(교단에서)수능 시험 단상

입력 2006-11-28 07:49:33

장면1 - 2006년 11월 16일 06시 50분.

수능일, 이른 아침 고사장을 찾았다. 3년 동안 가르친 제자들을 격려하기 위해서였다. 미처 날도 새지 않은, 갑작스레 쌀쌀해진 늦가을의 이른 아침임에도, 고사장 앞은 수험생들과 부모님들과 각 학교 선생님들로 붐볐다. 7시를 넘자 고사장으로 들어서는 수험생들이 부쩍 늘어났다. 낯익은 제자들의 얼굴도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주머니에 넣어둔 손으로 제자들의 시린 손을 부여잡으며 응원했다.

"고사장 안에 네 점수가, 잔뜩 쌓여 있으니까, 마음껏 퍼 담아오렴."

긴장을 풀어주려는 몇 마디 말에도 아이들은 좀처럼 긴장을 풀지 못했다. 아닌게 아니라 사회진출을 위한 첫 관문을 열어젖히는 제자들의 얼굴들에는 기대의 밝음과 불안의 어둠이 뒤섞여 있었다. 그 아이들을 미명(未明)의 어둠 속에 선 어머니들이 꼬옥 껴안아주었다.

'내 딸, 사랑해!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엄마는 내 딸을 믿어!'

이 미명의 어둠과 늦가을의 난데없는 을씨년스러움이, 문득 어지럽고 가슴 아린 수험생들과 부모님들과 선생님들의 내면 풍경 같아 보인다. 가을 산사(山寺)라도 찾아야겠다.

# 장면2 - 2006년 11월 16일 18시 00분.

가을이 지나가는 산사(山寺)는, 침묵하고 있다. 가을 산사의 뒷산 숲속에서 울긋불긋 단풍 물든 낙엽들이 떨어져 내린다. 빛의 침묵. 가을 산사의 추녀 끝으로 철새떼들이 울음소리를 부리에 물고 떠나가고 있다. 소리의 침묵. 가을 산사에 때마침 저녁 으스름이 어둡게 찾아온다. 형상의 침묵. 가을 산사는, 그리하여 모든 것이 지워지고, 사라지고, 텅 비워진다. 그 텅 빔의 한가운데서 젊은 승려 하나가 저녁 예불을 알리는 범종을 울린다. 텅 빈 범종의 아가리에서 울리는 소리는 온 몸을 울리고, 온 계곡을 울리고, 온 산을 울린다. 스스로를 온전히 텅 비웠기에 범종의 소리는 저토록 크고 깊은가!

지금쯤, 시험은 끝이 났을 것이다. 시험결과에 상관없이 학생들의 마음 한구석이 텅 비워져 가고 있을 것이다. 입시전쟁, 입시지옥이라는 극단적 표현이 결코 낯설지 않은 우리사회에서 적어도 중·고교시절 6년간 학생들의 모든 생활은 '수능시험'을 중심으로 계획된다. 그러니까, 학원과 과외, 수행평가, 내신시험의 빡빡한 일상으로 아이들의 삶과 사고에서 여유와 느림을 지우고, 경쟁과 조급을 각인(刻印)시켜온 그 '수능시험'이, 드디어 끝이 난 것이다. 생활의 중심이 사라진 그 텅 빔의 헛헛함은 때 이른 허무감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저조한 시험결과와 만나면서 절망감을 낳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알고 보면 우리들의 삶이란 바로 그 헛헛함과 텅 빔의 연속인 것이며, 그 '마음의 텅 빔'의 외연(外延)을 넓혀, 삶의 깊은 울림을 담아내야 하는 것 아닌가! 저 빛과 소리와 형상의 침묵 속에서 깊어가는 늦가을과 텅 빈 울림으로 온 산을 울리는 범종소리처럼!

시험을 마친 수험생 제자들이여, 그대들의 가을이 텅 빈 충만으로 깊어지기를.

김상묵(포항제철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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