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두어 세대쯤 흐르면 인걸이 간 곳 없음은 물론 산천 또한 의구할리 없다. 더구나 근래 30,40년 사이 전국토가 개발지상주의에 빠지고 덩달아 부동산투기가 만연한 이래, 옛날의 그 '금잔디 동산'이 멀쩡히 남아있는 쪽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다.
대구에서 가장 번화한 네거리 중의 하나인 MBC 네거리는 40여 년 전만 해도 큰 못이었다. '골짜기에 둘러싸인 큰 못'이란 뜻에서 이름 또한 '한골못'이었다. 씨알 좋은 붕어들이 곧잘 낚여 낚시꾼들의 발길이 잦던 곳이다. 못의 동남향 소잔등처럼 둥글고 길게 보이는 산등성이는 온통 공동묘지였다. 지금의 시민체육공원이다. 이 산등성이의 2군사령부 쪽인 양지바른 남향이 유택으론 길지여서인지 무덤이 더 많았다.
계명대 대명캠퍼스 일부나 영남대학병원 일부 그리고 동대구세무서와 백합맨션 자리는 40,50년 전만 해도 모두 공동묘지였다. 또 본리공원과 달서구청 일부, 월성초교자리며 신천아파트와 동신아파트 일대도 이승에서 한을 머금은 영혼들이 마지막으로 찾아가는 '북망산천'이었다. 예부터 불탄 자리와 묘지자리엔 재물이 잘 인다는 속설이라, 이 곳에 둥지를 튼 학교나 관공서·아파트들도 그 동안 재운이나 관운이 따랐는지 모를 일이다.
지금 대구여고가 있는 범어동 240번지 일대는 범어(泛魚)못 자리이다. 또 신천동 송라아파트 일대와 철길 건너 동신초등학교 남쪽 일대도 송라(松羅)못이 있던 곳이며, 대명동 영선시장 인근은 영선(靈仙)못이 있던 자리다.
영선못은 이웃한 수도산과 어울려 한 폭의 그림 같은 절경이었다. 일제 때 지주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서창규(徐昌圭)의 개인 소유였던 약 3천여 평에 이르는 이 못의 여름철 연꽃구경은 볼거리였다. 또 가을엔 서향인 현 대구교대, 남향인 현 외인아파트일대의 황금물결을 이룬 들판을 내려다보는 것도 장관이었다.
도보로 10여분 거리인 남산동의 경북여고생들이 곧잘 찾아와 여고시절의 '추억만들기'에 요긴히 쓰인 곳이기도 했다. 그 영선못이 쇠락한 저자로 바뀌었을 정도로 세월은 속절없이 흘렀다.
대구사람들이 정들여 찾는 신천(新川)은 옛날부터 대구시민의 숨통이었다. 여름철이면 대구 특유의 가마솥더위를 피해 남녀노소 없이 찾는 곳이었다. 가창댐이 들어서기 전까진 수량이 많아 멱을 감거나 천렵을 하기 알맞았다.
대봉동 용두방천과 신천동 푸른 다리 근처, 산격동 현 도청 앞에는 큰 웅덩이(소.沼)가 있어 뱀장어나 가물치도 곧잘 잡혔지만 멱 감던 아이들의 익사가 잦던 곳이기도 했다. 6.25 직후엔 피란민들의 천막과 밥솥으로 덮인 적도 있었고, 휴전 뒤엔 노천 빨래터에다 염색장소로 변하면서 옛 정취를 잃고 말았다.
금호강 하류인 팔달교 주변의 모래사장은 모래찜질 터로 유명했고, 동화천 주변인 무태마을 역시 초등학생들이 곧잘 가는 원족(소풍)명소였다. 조금 멀리는 동촌유원지와 가창 냉천 골, 앞산 안지랭이 골, 화원유원지 또한 대구사람들이 짐짝버스에 실려 가면서도 철따라 찾는 놀이터였다.
60년대 후반만 해도 동촌의 금호강 물은 어찌나 맑았는지 송사리들이 노니는 모습이 환히 보였는데, 70년대 들어 수상주점과 상류의 공업폐수가 스며들면서 급속히 '죽은 강'으로 변모했다가 간신히 되살아나고 있다.
도시개발의 희생물은 언제나 만만한 저수지였다. 오늘날 수도권의 신도시지역에선 일부러 인공호수를 만들지만 한 세대 전의 대구도시개발주역들은 손쉬운 저수지부터 메워 택지로 만들었다. 수성못과 성당못, 달서구의 도원지가 '수변공원'으로 용케 살아남은 것은 도시외곽에 있어 눈독을 피한 덕택이었다.
만일 범어못이나 송라못, 감천동의 '감생이못', 비산동의 '날뫼못'의 전부 혹은 일부나마 '호수공원'으로 살아남았더라면 오늘의 대구는 지금보다 훨씬 '살고 싶은 도시'가 되었을 것이다. 곳곳에 수변(못)이 많던 그 시절의 대구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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