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가에서-나의 책방 순례기

입력 2006-11-25 07:02:06

나는 독학 체질이다. 남에게 배워서 하는 공부를 별로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은 오랫동안 몸에 배인 습관 탓이리라. 가능하다면 생이 끝날 때까지 배우고 느끼며 스스로 깨닫고자 한다. 돈오점수, 글쎄 이런 아집덩어리라니.

60년대 말 경주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곧장 대구로 올라왔다. 두어 번 입시에 실패한 뒤 나는 더 이상 상급학교를 마음으로 작파해 버렸다. 그리고 막 산업화로 이행되던 구미의 대기업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말이 직장 생활이지 2천명의 직원 속에서 가장 나이 어린 축에 들었다.

내가 세상에 내던져져 첫 봉급을 탄 뒤 산 책이 심훈의 '상록수'와 박계형의 '별을 보고 산다' 였다. 서재를 뒤지니 '별을 보고 산다'가 나왔다. 코끝이 찡했다. 책 뒷장에 1971년 8월 29일이라고 적혀 있다. 값은 400원, 당시 회사의 봉급이 대개 일당이었다.

대기업에서도 군대 갔다온 사람은 280원 정도 받았다. 사흘을 꼬박 일해야 소설책 두 권을 사 볼 수 있었다. 당시는 책도 귀했을 뿐만 아니라 책값도 꽤나 나갔다. 그만큼 책이, 사람이 대접받던 시대였다. 그러나 나는 책값에 대해서는 한번도 아깝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아무리 직장 생활이 힘들어도 시를 붙들고 살고자 했다. 기숙사에 처박혀 닥치는대로 책을 읽었다. 잡다한 책 속에 파묻혀 지적 욕구를 채웠다. 다양한 관심의 폭 때문에 나는 잡학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책 읽는 것 못지않게 책방을 들락거렸다.

풀과 별·현대시학·심상·시문학 등 시전문지가 차례로 창간되었다. 뒤이어 미당서정주전집, 박목월전집, 조지훈전집 등 초호화 양장본이 나왔다. 나는 얄팍한 주머니 사정은 생각하지 않고 이 전집을 구해 내 정신의 자양으로 삼았다. 지금도 보배처럼 모시고 살고 있다.

나의 책방 순례는 대구역 앞 삼신서적에서 시작된다. 박서점, 문화서점, 본영당, 골목길 속에 자리잡은 학원서점, 그리고 시청 입구에 있던 동서남북이 나의 단골 책방이었다. 특히 동서남북은 헌책방으로 주인이 후덕했다. 책을 정리하는 법이 없었다.

산더미처럼 쌓인 먼지투성이 책더미에서 오랜 시집을 발견하면 정말 횡재한 기분이 들었다. 그 뒤 중앙통에 태극서점으로 이어졌다. 우스개 말로 좌우 중앙의 급소에 태극서점이 있다고 주인을 놀리곤 했다. 호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곧장 외상이었다. 그러나 주인은 책값을 독촉하는 법이 없었다. 거기다 몇몇 사람에게는 외상 장부까지 아예 없었다. 나도 그 축 끼어 있었다. 지금도 가형(家兄)처럼 가깝게 지낸다.

20,30대를 건너오던 나에게 책방은 문화사랑방이었다. 지금은 서점도 대형화되어 대구 중앙통의 서점들은 모두 문을 닫았다. 대기업의 한 서점만 자리를 잡고 문전성시를 이룬다. 이렇게 하여 정이 묻어있던 나의 책방 순례는 그렇게 막을 내리고 말았다.

박진형(시인·만인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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