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마당) 상화시인 추모사업 다시 시작해야

입력 2006-11-09 07:53:05

민족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인 이상화 시인은 한 생애 동안 나라를 빼앗은 일제에 대한 저항정신을 품고 살았다. 3·1 운동과 의열단 사건 등의 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했고, 저항정신을 바탕으로 한 민족시를 쓰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우리 문학사를 돌이켜 보면 항일의 흔적을 보인 문인들보다는 절필과 훼절의 흔적을 보인 문인들이 더욱 많다. 그러나 해방 60여 년이 지난 지금 친일에 앞장섰던 그들은 해당 지역을 빛낸 향토 작가의 이름으로 기억되고 있기도 하다.

전북 고창에는 미당 서정주의 시 문학관이 들어서 있고 미당 문학상 행사 또한 성대하다. 전북 군산에서도 친일 논쟁 속에 중단되었던 채만식 문학상 부활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반면 한평생 민족의 독립을 위해 노력했던 이상화 시인에 대한 기념사업은 부족하기만 하다.

이상화 시인을 기념하는 제대로 된 공간이 없고, 기념사업을 찾기도 쉽지 않다. 그간 시인의 옛집 보존운동이나 이상화 문학관 건립 추진이 제기되었지만 개인이나 시민단체의 역량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이상화 시인을 기념할 수 있는 것은 허술하게 관리되고 있는 시인의 옛집과 달성공원과 두류공원 그리고 수성못에 있는 시비와 대구 인근에 위치한 이상화 시인의 묘가 전부이다.

담교장(談交莊)으로 불렸던 시인의 옛집 사랑방은 독립투사·사회운동가들이 모여 일본의 침략 전쟁을 성토하고 울분을 토했던 공간이다. 당초 소방도로 개설 예정지로 결정되어 철거 위기에 놓였던 옛집은 시민운동을 통해 보존이 결정되었고, 인근에 주상복합 건물을 짓는 기업체에서 고택의 소유주와 매매 계약을 체결해 이 집을 대구시에 기부 채납했다.

이후 옛집 보존에 나섰던 한 시민단체에서 일부 정비를 하기도 했지만 고택의 모습은 처연하기만 하였다. 시인의 집 부근 어디에도 표지판이나 안내문을 찾을 수 없다. 관리하는 사람이 없다 보니 더러 깨어진 기와들도 눈에 띄고 방 안의 벽은 켜켜이 먼지가 쌓여 있다. 방구들 한쪽이 내려앉아 움푹 패어 나갔고, 집 안 석류나무가 웃자라 을씨년스럽기까지 하다.

최근 대구에서는 '제1회 상화 문학제' 행사가 있었다. 상화 시화전, 문학 학술 세미나, 백일장, 시 낭송 대회 등 많은 행사들이 있었다. 문학제에 참석한 많은 사람들이 축하의 인사와 함께 만시지탄(晩時之歎)이라는 표현을 아끼지 않았다.

그간 대구의 척박한 문학적 여건이나 문화예술 환경이 여유롭지 못했음에 대한 통탄일 것이다. '시작이 반이다' 라는 말이 있다. 작품과 행동으로 저항했던 시인의 삶과 문학을 기념하는 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의무이자 책임이다.

이승우(영남대 국문과 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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