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옥입니다] 탱자와 추석

입력 2006-10-04 08:43:54

후배가 탱자 두 개를 건네준다. 시골에 갔다가 모처럼 탱자 울타리를 만났기에 따왔다고 했다. 노랗게 물든 그것을 코 끝에 대니 쐬~하니 밀려오는 향내. 레몬의 진저리나게 시그러운 내음과도, 오렌지의 달콤새콤한 내음과도 다른 향기다.

눈 앞으로 풍경 하나가 펼쳐지는 듯 하다. 동구밖 과수원 길에서, 마을 골목길 에서 마주치곤 했던 탱자 울타리. 봄이면 하얀 꽃 피우고, 여름내 동글동글한 초록 탱자를 달고 있다 서리 내릴때 쯤이면 노랗게 익어갔다. 마을 아이들의 숨바꼭질 놀이터로, 처녀총각들의 남몰래 데이트 약속 장소로 애용되었고, 여름날의 군것질거리 다슬기는 탱자 가시가 없으면 먹기 힘들었다. 가을이 깊어지면 어른들은 황금빛 탱자를 따서 집안 곳곳에 두고 향기를 즐겼다.

옛사람들은 탱자를 다소 부정적인 시선으로 보기도 했다. 淮河(회화) 이남의 귤을 회화 북쪽에 옮겨 심었더니 크고 달콤한 귤 대신 작고 시고 떫은 탱자가 열렸다는 故事(고사)가 그러하다. '南橘北枳(남귤북지)'니 '橘化爲枳(귤화위지)'니 하는 四字成語(사자성어)들도 모두 같은 의미다.

또 '枳棘(지극)'은 '탱자나무 가시'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탱자나무와 가시나무' 를 일컫기도 했다. 선인들은 날카로운 가시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이것들을 흔히 '나쁜 나무'로 여겼다. 뾰족한 가시도 그러려니와 먹지도 못할 '못된' 열매를 맺는 게 밉쌀스러웠던가 보다.

최장 9일의 황금 추석 연휴를 맞아 해외로 떠나는 여행족들로 공항마다 붐빈다고 한다. 세상 참 많이도 달라졌다. 예전엔 명절이면 만사 제쳐놓고 고향으로 달려갔더랬는데….

그때 그시절의 귀향 행렬은 대단했다. 역마다,버스 터미널마다 새까많게 몰려든 귀성객들이 저마다 먼저 타겠다고 난리니 경찰이 길다란 대막대기를 휘두르며 호통치는 진풍경마저 나타났었다. 버스 창문으로 기어들어가는 이, 기차에 매달리는 이, 짐칸에 짐짝처럼 꾸부리고 앉은 이, 그야말로 필사적이었다.

하지만 이제 더이상 명절=귀향의 등식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책상 위에서 현기증이 날만큼 연신 향내를 뿜어내는 탱자를 보니 탱자 울타리만 우리 시야에서 사라지는게 아니구나 싶다.

전경옥 논설위원 sirius@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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