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부] 단풍

입력 2006-09-26 11:49:49

'어느 계집이 제 서답을 빨지도 않고/능선마다 스리슬쩍 펼쳐놓았느냐/용두질이 끝난 뒤에도 식지 않은, 벌겋게 달아오른 그것을/햇볕 아래 서서 꺼내 말리는 단풍나무들'. 시인 안도현은 불타는 가을산에서 저 혼자 관능으로 달아올랐다. '버려야 할 것이/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방하착(放下着)/제가 키워 온/그러나 이제는 무거워진/제 몸 하나씩 내려놓으면서/가장 황홀한 빛깔로/우리도 물이 드는 날' (도종환의 시 단풍 드는 날).

○…하늘이 까마득해지면서, 울렁거린다. 가을 멀미다. 서성대거나 떠나야 하거나 어찌할 수 없는 증세다. 삽상한 바람, 낭자한 핏빛 산색, 호젓한 산촌, 저물 녘 낯선 곳을 찾는 추정(秋情)이다. 반도가 붉게 물들면서 가을 행락 인파가 산을 덮고 바다를 이루고 있다는 소식이다.

○…일주일 전 금강산을 물들인 단풍은 설악산을 지나 오늘은 오대산 자락에 불을 댕겼다. 불길이 매일 50m씩 남하 중이다. 이런 속도이면 팔공산은 다음달 14일쯤 오색 물감을 뒤집어쓴다. 이 현란한 행차 소식에 벌써부터 벼르는 사람이 많다. 올 단풍은 예년보다 3일, 지난해보다 8일 정도 앞당겨졌다. 맑은 날이 많고 일교차 또한 커 빛깔은 더 환상적이라고 한다. 단풍은 기온이 떨어지면서 엽록소 파괴로 생기는 현상이다. 그러고 보면 서정주의 시는 빼어난 과학적 감성이 아닌가 싶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저기 저기 가을 꽃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

○…국내에서 소문난 단풍 트레킹 코스는 설악산 천불동계곡, 백담계곡이다. 오대산도 못지 않다. 다양한 활엽수가 연출하는 황홀지경이 발길을 묶는다. 전남 구례의 피아골도 단풍 명소다. 내장산이 내뿜는 색상은 여전히 강렬하다. 최근에는 잘 닦인 지방도로를 드라이브 삼아 사람이 꾀지 않는 산골 단풍을 찾는 이도 많아졌다.

○…해외여행 붐을 타고 캐나다의 웅장한 단풍도 인기다. 아직 우리에겐 있는 사람들의 관광 도락이겠지만, 나이아가라에서 퀘벡으로 이어지는 장장 800km의 메이플로드는 안 가 봐도 장대한 파노라마다. 아무리 그래도 쨍쨍한 하늘 아래서 소박하게 맛드는 우리 단풍이야 따를까. 그런 스케일에 매몰당해서야 깊어 가는 가을을 사무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공연한 시비인가.

김성규 논설위원 woosa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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