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사학계에서 유독 중국만이 고구려나 발해사를 자국에 예속된 지방정권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러시아는 오래전부터 중국이 중화 패권주의적 의도를 갖고 발해사를 자국사로 편입하려 한다고 지적해온 것으로 나타났다. 신중국 건립 이후부터 발해사 연구를 상당히 중시해왔던 중국 사학계는 1960년대 문화대혁명의 영향으로 10여 년간 발해사 연구를 중단해야 했다. 그러다 중국이 계급투쟁에서 사회주의 현대화 건설로 노선을 전환한 1978년 12월 중국공산당 11차 3중전회 이후 발해사 연구와 발해 유물 발굴을 본격 재개했다. 불과 수년 만에 동북지역 사학계를 중심으로 발해는 중국의 소수민족 정권으로 발해국 지역은 일찍이 중국 영토였다는 내용의 60여 편의 논문이 각종 논총, 학보지 등을 통해 잇따라 발표됐다. 먼저 중국의 저명한 역사학자인 왕청리(王承禮)가 1979년 '발해국은 속말말갈 사회발전의 필연적 결과로 당나라의 일부분에 속한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왕청리는 나아가 80년대부터 발해의 사회통치 사상은 유가사상으로 사실상 발해 문화는 당의 문화라 할 수 있으며 당 왕조의 책봉을 받고 스스로를 당의 신하로 칭한 지방정권이라고 본격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발해는 당 왕조에 예속된 정권'(장서우펑, 80년), '발해정치제도 약술'을 통해 '발해는 책봉, 조공, 볼모를 통해서뿐 아니라 관제나 행정제도도 거의 당 제도를 모방했다.'(웨이궈충, 81년)는 주장이 이어졌다. 또 다른 역사학자 장옌(莊嚴)도 82년 발해의 정권 귀속 문제에 대해 발해는 당조 관할하의 지방민족정권이라는 결론을 내렸으며 리전푸(李殿福)는 87년 발해국은 처음부터 끝까지 당의 한 부분으로 발해문자는 한자였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발해사에 관심이 높은 남·북한을 비롯해 일본, 러시아의 사학계는 중국과는 전혀 다른 입장을 보인다. 일본 학자 쓰다 소기치(律田左右吉)는 '발해사고(渤海史考)'를 통해 발해국 전신은 말갈 7부족 가운데 속말말갈로 고구려 문화의 이입과 당 문화의 수입을 통해 독자적인 고유문화를 형성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러시아도 연해주에 터를 잡고 있던 발해에 대한 적잖은 연구를 진행해왔다. 구 소련 사회과학원의 알렉세이 오클라드니코프 박사는 73년 '소련 극동 고고학의 새로운 발견'이라는 논문을 통해 "중국 중심주의 사관은 세계문화사에 위협되는 요인으로 결단코 반대해야 한다."며 중국 사학계의 주장을 공박했다. 소련 학자 사프쿠노프도 68년 '발해와 연해지구 문화유적' 논문을 통해 "발해 통치자는 모두 고구려 이민자들에게서 기원했다."며 "발해 문화의 독립성을 말살하는 것은 중국이 발해사를 만주사 및 중국사에 편입시키려는 의도"라고 주장했다.
북한 사회과학원은 70년대부터 발해국은 고구려 왕조를 계승했다는 주장을 지속적으로 내놓고 있다. 북한 역사학자 박시형 교수는 62년 '역사과학'을 통해 "발해족은 고구려 인민이창건한 국가로 발해국은 주민, 영역, 주권 등으로 볼 때 모두 고구려의 후계자"라고 밝혔다. 또 다른 북한학자 주영구도 71년 "발해족은 고구려 문화의 계승자이자 발전자이며 고구려 인민은 고구려 고지에서 나라를 건립했다."는 주장을 폈다.
홍콩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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