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번역가 이경식-출판사대표 하응백 '나는 아버지다' 출간

입력 2006-09-11 08:29:32

작가이자 번역가인 이경식과 출판사 대표인 하응백은 30년 지기(知己)이다. 1976년 대구 대건고 1학년 시절 3월에 처음 만났고, 함께 문예반에 가입해 시도 쓰고, 산문도 쓰고, 시화전과 백일장에도 참가했다.

그때 3학년이었던 서정윤이 나중에 '홀로서기'로 유명 시인이 되었고, 2학년이었던 박덕규는 전방위 문인이 되었다. 매일신문과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해 왕성한 문학활동을 펼치고 있는 안도현 시인은 1년 후배가 된다.

그때 문예반을 지도했던 국어 교사가 바로 대구문인협회장을 지낸 도광의 시인. 수업 시간에 보들레르·말라르메·랭보 등의 프랑스 상징주의 시 이야기와 미당 서정주 시인의 시와 삶 그리고 투르게네프의 소설 등을 이야기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지금 생각해보아도 진도를 나가는 것 보다 문학 이야기가 훨씬 좋았다. 문예부원들은 가끔씩 중국집 뒷골방에 모여 담배를 꼬나물기도 하고, 소주를 홀짝거리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철부지 낭만주의자들이었다.

서울대 경영학과와 경희대 국문과에 입학한 그들은 대학시절에도 자주 만났다. 1980년 신군부가 득세하던 어둠의 계절, 이경식은 운동권이 되어갔다. 야학을 하거나 노동자 풍물패를 이끌었고, 노동자 연극의 대본을 쓰고 연출을 하는 등 일종의 노동문화운동을 했다.

서울 신림동과 봉천동의 자취방을 전전하며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던 시절, 이경식은 고위층 교육자의 딸이었던 숙명여대생과 운명적인 연애에 빠졌다. 운동권을 싫어했던 어른의 반대로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던 두사람은 친구들과 운동권들만 하객으로 참석한 결혼식을 올렸다.

80년대 후반 무렵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감옥까지 갔다온 이경식은 운동권이 각자 제 갈 길을 찾아가던 90년대 초반이 되면서 영화판에 발을 들여놓았다. '개같은 날의 오후' 시나리오를 쓰기도 하고 방송·드리마 대본을 쓰기도 하면서 살아왔다.

그러다 실속없는 영화판에만 기댈 수 없어 고교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냈던 영어와 일어 실력을 밑천 삼아 번역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 사이에 아들도 두 명 탄생했다. 그렇게 흘러온 30년 세월,

이경식과 하응백은 자주 만날 때는 거의 매일, 적어도 두어 달에 한 번은 만나며 지내왔다.

한 10년 전부터는 둘이 낚시를 자주 다닌다. 그동안 두사람의 주된 화제도 많이 변했다. 정치와 사회에 대한 토론이 많았으나, 가정을 이루고 속물(?)이 되어서는 집 사고 돈 버는 이야기도 많이 했다.

그러다가 어느덧 주된 화제가 아이들의 교육 이야기로 바뀌었다. 40대 중반을 넘긴 나이로 중·고생 아이들을 두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이제는 자신들의 이야기가 아닌 아이들의 이야기를 주로 해야 하는 아버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의기투합한 것이 '이 시대의 바람직한 아버지의 역할'을 주제로 책을 내는 것이었다. '니가 쓰고 내가 책 내마'라는 식이었다. 그 결과물이 '나는 아버지다'(휴먼 &북스)란 책이다. 이 책은 이경식의 개인적 삶의 기록이기도 하고, 보편적 40대 아저씨들의 고민꺼리이기도 하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아이들을 바르게 훌륭하게 키울 수 있을까에 대한 우리 시대 아버지의 고민이요, 그러기 위해서는 더욱 우리가 당당해야 한다는 실천적 선언이다. 이경식은 여기서 "시대와 자녀에게 부끄럽지 않은 당당한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10대 자녀를 둔 40대 아버지만의 '아버지 상'을 제시한다. 아버지의 위엄과 권위가 지켜질 때 가족이 행복해 질 수 있음을 역설한다. 돈 버는 기계가 아니라 가족의 정신적인 기둥으로 다시 태어나는 당당한 삶을 되찾기를 권유하고 있다. 두사람은 다시한번 외친다. "우리는 아버지다."

조향래기자 bulsaj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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