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 시평] 친일파와 부일민족반역자

입력 2006-08-30 09:07:42

해방되던 1945년 8월 15일 그때부터 시작된 친일파 처벌 논란은 광복 61주년을 맞이하는 오늘까지도 그치지 않고 있다. 2002년 2월 광복회에서 "친일반미족행위자명단"을 낸바도 있었으나 그 얼마 후 과거사규명위원회에서도 "친일행위자명단"일부를 발표하였는데 그 내용은 앞서 발표한 광복회 것과는 상당수 다르게 나와 있었다. 그러나 우리들은 어느 기관이나 사학자가 내놓은 것보다도 바로 항일운동 당사자들의 단체인 광복회측의 명단을 더 존중하고 싶었다.

과거사규명위원회에서 어떤 기준으로 판정하였는지 알 수가 없었으나 유력한 친일 후손들을 비호하려거나 지나친 감정이 개입되지 않기를 바랐다.

무엇보다도 신중해야 할 것은 친일행위와 부일민족반역행위를 분명하게 해야된다는 것이다. 친일이란 글자 그대로 일본사람과 친하다는 것이다. 친일하였으나 선진 학문을 습득하거나 기술을 익혀서 조국의 민생복리 증진에 기여한 인사도 있었을 것이다.

과거사규명위원회의 판정에 관한 당시의 신문보도에 의하면 자원하여 만군사관학교나 일본육사에 입교한 것은 친일행위로 판정된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일제 당시 일본 제국대학을 비롯한 각종 대학에 자원 입학하여 고급 황민화 교육의 일선에 있었던 각급 사범학교 출신의 교원들은 또 어떻게 되는 것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조국 중화민국을 위하여 평생을 항일투쟁으로 일관했던 장개석 총통도 일본 사관학교 출신이라고 하였다.

또 어느 직급 이상은 친일이고 그 이하는 아니다 라는 것도 옳지 못한 기준이다. 그 당시 일제의 주구들을 직급이나 신분으로 구분할 수는 없었다고 한다. 당시 저명인사들에 대한 일제의 회유방법에는 그 대상과 그 정황에 따라 교묘 악랄함이 무상하여 직급이나 신분에 따라 일률적으로 친일여부를 말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과거사규명위원회에 관한 당시 보도에 의하면 전대통령, 대학총장, 언론사 대표, 종교계 대표, 군장성, 저명 문필가, 재벌기업가 등이 망라되어 있었다.

지금도 일본에서는 "일한합방은 양국합의로 이루어졌다. 한국사람은 모두가 환영했다. 은혜를 베풀어주었더니 원수로 갚으려 한다"는 등의 망언을 거듭하고 있는데 그들이 만약 우리가 판정하여 내놓은 친일파 명단을 보게 된다면 역시 한국에서는 대통령을 위시하여 온 나라가 일한합방을 환영했구나 라고 새삼 확인하게 될 것이다. 많은 국가예산을 들여 내놓은 친일파 명단이 그들에게는 흥겨운 망언의 입증자료가 될 것이다.

이는 장래 한국과 일본 양국 간의 국교에 있어서도 상호 평등의식을 저해하는 크나큰 원인이 되는 것이 아닌지 걱정되지 않을 수가 없다.

해방 61년이란 긴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 국적이나 국경이나 민족의 개념도 흘러가는 세월 따라 변하고 있는 듯하다. 친일의 개념도 그때 그대로가 아닐 것이다.

원래 친일이란 일제가 우리들을 침공한 때부터 쓰여졌던 용어일 것이다. 이 용어에는 처음부터 저주 혐오가 따라 다니는 말로 되어 있었다. 친일한 사람이면 어김없이 우리가 가해자로만 느끼게 되는 말이기도 하였다. 사실 친일이란 글자 그대로라면 친화이거나 우호의 뜻으로 쓰여져야 할 용어가 아닌가 한다.

친일한 사람이 우리들에게 가해를 했다면 친일을 탓하는 것이 아니고 가해행위를 탓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면 그 가해행위의 정도에 따라 그 제재의 경중이 정해질 것이다.

과거사규명위원회에서는 친일한 자가 저지른 부일반민족행위를 가려내는 것이 주어진 목적 업무일 것이므로 친일파란 용어를 사용하기보다는 부일민족반역행위자로 지칭하고 이 용어에 적합하다 할 악질 반역행위자를 색출하여 우리의 역사 앞에 내놓아야 할 것이다.

다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친일파란 용어보다는 부일민족반역자란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적절하다.

박동욱(광복회원·대구시 수성구 시지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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