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꿈 나의 삶, 김연철] ①공부를 잘 해 드리자

입력 2006-08-14 08:54:14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 선산 무을면 송삼동에 있는 우리 집에서 선산읍에 있는 학교까지는 왕복 24km나 되었다. 이 먼 길을 세 사람이 함께 다녔는데 한 사람은 집안 동생이고, 한 사람은 우리 집 외손으로 이색 선생의 후손이다. 우리 집은 자전거 한 대쯤 살 형편은 되었으나 가친께서는 함께 다니는 두 사람이 자전거를 살 때까지는 같이 걸어 다녀야 한다며 사 주시질 않았다.

세 사람은 그 먼 길을 맨발로 다녔다. 이유는 부모님들이 저렇게 힘들여 고생하시는데 우리는 신이라도 아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겨울철을 제외하고는 맨발로 집을 출발하여 선산읍 입구(지금의 선산여중·고 앞) 새터에서 발을 닦고 학교에 들어갔다. 우리는 부모님을 위하여 '공부를 잘 하자'가 아니고 '공부를 잘 해 드리자'라고 다짐하면서 공부에 정성을 쏟았다.

남이 보면 우리의 모습은 아주 초라했겠지만 우리는 조금도 기죽지 않고 열심히 공부했다. 남들은 양복천으로 교복을 해 입어도, 우리는 무명에 염색한 검은 교복을 만들어 입었고, 교복이 해어지면 우리 손으로 흰 실로(그 때는 검은 실도 귀했다) 꿰매고 그 위에 먹물을 칠했다. 그래도 열등감 같은 것은 전혀 느끼지 못했고 아주 재미있게 학교를 다녔다.

때때로 하교 길에 콩서리를 해 먹거나, 남의 밭에 들어가 고구마를 캐 먹은 일들은 지금도 기억에 남는 낭만이었다.

등교할 때는 날이 새기 전에 집을 나서야 했고, 돌아올 때는 이내 어두워지기 때문에 세 사람이 걸으면서 서로 모르는 것을 토론하곤 했다. 누가 보건말건 길에서 책과 노트를 펴 놓고 정답을 확인하기도 하고 문제를 다시 풀어보기도 했다. 이것이 버릇이 되었는가, 훗날 내가 장학사가 되고 중등과장이 되었을 때도 차를 타지 않고 걸으며 꼭 알아야 할 외국어나 시사용어들을 외우며 다녔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했던가.

중학교 3학년 중간쯤 되는 2월에(당시 학년 초는 9월) 초등학교 교사 채용 시험이 있었다. 중학교 5학년 이상이어야 응시 자격이 있는데 나는 학력 미달로 1차 예비 시험을 거쳐 본시험에 응시해야 했다. 1차 합격을 한 후 본시험을 보고 한참을 기다리니 합격 통지서가 왔다. 전교에서 두 사람이 합격했는데 담임선생님께서 더 좋아하셨다. 선배들도 안 되는데 중 3이 된 것을 아주 대견해 하셨다. 서부국민학교에서 교생을 마치니 교사 자격증이 나왔다.

담임선생님은 먼 앞날을 내다보시고 취직보다 대학 진학을 권했다. 나는 선생님의 말씀을 따르기로 하고 죽기로 공부했다. 잠을 덜 자기 위해 자기 전에 물을 한 사발씩 마셨다. 2시간쯤 자면 소변이 마려워 잠을 깬다. 누구한테 물어볼 데도 없고 이끌어줄 사람도 없는 형편이라 과목별로 책을 정해놓고 정독에 정독만을 거듭하여 아예 외워 나갔다. 결국, 원하던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수학교육과에 합격했다. 우리 학교에서는 여러 대학에 많이 합격했으나 사범대학에는 두 사람이 합격했다.

이상을 향한 도전의 첫걸음이 시작되었다.

김연철 전 대구광역시 교육감

※오늘부터 김연철 전 대구광역시 교육감의 회고담을 매주 월, 목요일 20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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