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암칼럼] '베트남 처녀' 현수막

입력 2006-07-31 11:12:18

장마 끝 휴가철, 도심을 벗어나 시골 길을 달린다. 띄엄띄엄 논둑가 아스팔트 길 옆에 낯익은 현수막들을 본다.

'베트남 처녀'. '베트남 결혼 054-○○○-××××' '착하고 예쁜 베트남 처녀 011-○○○-××××'. 이제는 자주 눈에 익어 무심히 지나친다. 벌써 흔한 얘기가 돼버린 양 눈여겨보지도 호기심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나 고작 십여 리 길에 두세 번씩 내걸린 베트남 처녀 현수막을 보고 가노라면 사랑에는 국경이 없다는 따위의 낭만보다는 가슴 저 밑에서 아려오는 듯한 그 무언가를 느끼게 된다. 하나는 슬픔 같은 것이고 또 하나는 '두려움'이다.

시인 이해리는 '베트남 소녀 유리'라는 시에서 이렇게 그 슬픔을 그렸다.

'복지관 할머님들 틈에 끼어 한글 배우는 베트남 소녀 '유리'. 할머니들 물음에 손가락 꼽아 남편은 쉰세 살, 두 달 전에 시집왔다고 서툰 발음하는 순진한 눈을 본다. 가지런한 치아 붉은 입술 속에 남실거리는 메콩강이 슬프다.

어느새 세계 11위, 경제 선진 대한민국, 쉰을 넘긴 홀아비도 열아홉 살 처녀를 맘대로 골라오는 힘이 슬프다. 국제결혼 사이트마다 무슨 상품처럼 동영상으로 광고되는 앳된 베트남 처녀들. 키 162, 몸무게 45… 묵인된 노예처럼 마구 공개되는 신체 치수와 가족관계가 슬프다.

저런 경로로 왔을까. 겨우 두 번 본 날더러 즈네 집에 놀러 가자는 소녀. 49평 새 아파트, 집은 번듯하다마는 거동 못하는 두 具(구)의 시부모가 뒹구는 거실은 슬프다. 손님이라고 냉장고 열고 불쑥 부라보콘 하나를 내미는 유리. 그렇지, 아이스크림이나 입가에 묻히고 깔깔거리는 여고생이 제격이지.

주부라고 수긍하고 싶잖은 앳됨이 슬퍼 침대 위 앨범 속에는 떠나온 베트남이 젖어있다. 손가락 짚어 보여주는 사진 속 너울거리는 야자숲을 배경으로 남편보다 열 살이나 적은 친부모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하략)

피서길 논두렁 길가에서 무심히 펄럭거리고 있는 베트남 현수막 뒤엔 숱한 '유리'들의 사연들이 가려 있다.

사랑으로 맺어지는 인연도 많겠지만 결국엔 가난한 나라의 색시들이 잘사는 나라로 시집가야 하는 슬픈 현실을 내건 깃발이다. 그러나 현수막 걸린 길을 스쳐가는 우리들 중에 몇이나 그 시인의 마음이 돼 슬픔을 생각할까.

굳이 슬픔까지는 느끼지 않아도 좋다. 그렇지만 그 어떤 두려움까지도 느끼지 못한다면? 지금 우리 사회는 시인의 가슴처럼 슬픔을 느끼지도 못하고 위기를 의식 못하고 이성과 감성의 감각을 잊은 채 오만과 폭력과 아집으로 채워져 가고 있다. 나라가 기울면 내 나라 처녀들이 생계를 위해 중국의 농촌 노인에게 시집가야 하는 비극이 베트남에서만 일어나야 한다는 법은 없다. 그래서 나라 돌아가는 형편과 베트남 처녀 현수막을 보면서 섬뜩한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두려움도 없이 소수 강성 노조들은 보편적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불법 폭력을 일삼고 일부 전교조는 친북 이념을 대놓고 가르치고 청와대 사람들은 '닭 뼈다귀' 시비, 장관은 논문 시비로 날을 새는 모습들에서 이성과 감성이 마비된 오만과 폭력, 아집의 세상을 본다.

나라 경제가 어떻게 망가지든, 우리 2세들이 친북좌파로 물들든 말든, 국론과 화합이 갈라지든 말든 그래서 어느 날 중국이나 러시아 농촌 길바닥에 '한국 처녀 결혼' 현수막이 걸리게 되든 말든 두렵지 않다는 듯 설치는 사람들. 올바른 이성과 감성 대신 위험한 가치 아래 세상을 흔드는 사람들. 낡고 실패한 공산국가였던 베트남 처녀 현수막은 우리에게 그런 세력들에 대한 경계를 깨우치고 있다.

김정길 명예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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