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세이]까치에 대한 향수

입력 2006-07-29 08:47:56

어쩌다 기쁜 소식을 전해주는 사랑의 전령이었던 까치가 골칫덩어리, 말썽꾸러기로 전락했는지 모르겠다. 내가 어렸을 적에는 까치는 분명 기분 좋은 새, 재수 있는 새로 사람들의 사랑을 아낌없이 받았었다.

이른 아침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올 거라는 기대 때문에 온종일 설레는 마음으로 동구 밖 쪽을 힐끔거렸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실뭉치 같은 까치집이 있는 집이 그렇게 부러웠다. 까치집은 권위의 상징이요, 동시에 富(부)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실제로 까치집이 있는 집은 잘 사는 것 같기도 했다.

까치는 아름드리 감나무나 높다란 미루나무 같은 데 집짓기를 좋아했다. 미루나무는 집 안에 있는 나무가 아니다. 때문에 동네에서의 까치는 거의 감나무 가지에 축구공보다 큰 둥지를 틀어 알을 낳고 새끼를 길렀다.

어린 시절 한 때, 나는 우리 집 뒤란에 서있는 그리 크지 않은 감나무에도 까치집을 짓게 하려고 갖은 애를 다 써본 적이 있다. 심지어는 까치가 집을 짓기 편하도록 나뭇가지를 주어다 감나무 가지 위에 얼기설기 걸쳐놓기도 했었다. 그런데도 까치는 번번이 내 정성과 소망을 사정없이 외면하곤 했다. 정말이지 나로선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언젠가 한 번은 위험을 무릅쓰고 제법 자란 새끼까치를 잡아다 우리 집 감나무 가지에 묶어 두기도 했다. 이쯤 되면 어미까치도 별 수 없이 우리 집으로 이사를 와주지 않을 수 없을 거란 생각을 하면서 혼자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하지만 그건 순전히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끝내 까치들은 내 바람, 내 소망을 무참히 외면해 버린 것이었다. 나는 지금도 까치 둥지가 좋다. 소박하지만 뭔가 많은 비밀, 많은 이야기들이 숨겨져 있는 것 같아서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세상은 너무 많이 달라졌다. 삶의 모양새가 달라지고 인심이 달라졌듯, 까치들도 이미 예전의 까치가 아니다. 가을걷이를 끝내면서 한두 개쯤 저희들 밥으로 남겨둔 우듬지의 홍시도 수줍은 듯, 미안한 듯 다 파먹지 못하던 까치들이었다.

한데 지금은 허수아비를 우습게 알고, 반짝이 줄, 위장포 소리에도 겁없이 덤벼든다. 과수원 전체를 그물로 덮어 씌워놓아도 용케 뚫고 들어가 농사를 망쳐놓는 극성스러운 새, 악랄한 새, 무서운 새가 되어 버렸다.

진작부터 한전에서는 전봇대마다 바람개비를 설치하여 까치와의 끝없는 전쟁을 하고 있다. 이제 까치는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못된 새, 나쁜 새일 뿐이다. 그 먹을 것 없던 시절에도 온순하기만 했던 까치가 어떻게 이처럼 거칠고 공격적인 모습으로 바뀌었는지, 잘못되어 가는 세태를 보는 것 같아 안타깝고 씁쓸하기 이를 데 없다.

이제 까치들의 사는 모양새도 많이 달라졌다. 도둑맞을 그 무엇이 많은 부자 까치들은 경찰서 마당 철탑에 고층 아파트를 지어놓고 끼리끼리 모여 살기를 좋아한다. 그보다 형편이 조금 못한(?) 층은 면사무소 뒤뜰 감나무에 둥지를 틀고, 가난뱅이들만 예전처럼 먼 산 미루나무에서 淸貧樂道(청빈낙도)의 삶을 숙명처럼 사는 것 같다.

잃을 게 많다는 건, 새나 사람이나 풍요로움 이상의 불편도 있음을 알려주는 것 같아 자신도 모르게 쓴웃음이 나온다. 언제부턴가 알게 모르게 종달새, 제비, 굴뚝새, 참새, 물총새, 콩새, 매 등등 우리와 친근한 이름의 새들이 자꾸만 사라져 간다.

우리에게 편안함과 즐거움을 주는 동·식물이 멸종되는 지경까진 가지 않아야 할 텐데, 여간 안타까운 노릇이 아니다. 이러다 언젠가 까치마저 설 땅을 잃고 우리 곁에서 영영 사라져 가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래도 아직은 까치소리가 들리면, 맨발로 뛰어나가 와락 가슴으로 맞아야 할 꿈에 그리던 그 님이 올 것 같아 마음이 설레는데….

심형준(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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