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먼 나라 시인 구보씨의 사흘

입력 2006-07-17 07:56:04

늦은 밤 행사장을 빠져나온 구보씨가 혼자 술을 마신다. 수퍼에서 길가에 내놓은 의자에 앉아 휙 차가 스쳐갈 때마다 앞쪽으로 약간 쏠리는 탁자 위 종이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소주를 따른다. 오랜만의 자작(自酌)이다. 장마 중에 잠시 갠 하늘에선 달이 얼굴을 내민다. 보름인가.

문득 누가 달빛을 가리며 옆 의자에 앉는다. 후배녀석이다. 아까 행사장에서부터 잔뜩 볼멘 표정으로 앉아있더니 아직도 그 모양이다. 종이컵을 하나 얻어와 소주를 내민다. 역시 말없이 잔을 받은 녀석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문다. 글쓰기가 오직 소명이며 고독한 자아를 보여주는 것이라 믿는 자의 진지함, 그래서 녀석은 단체나 행사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

형, 히틀러가 만일 비인미술학교에 합격을 했더라면 전쟁광이 아니라 화가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에곤 실레와 만날 수도 있었죠. 녀석은 미술학도였다. 광기를 예술이 멋지게 한 방 또 잠재울 수 있었다는 겁니다.

문득 히틀러의 흰자위 드러낸 매서운 눈과 자화상 속 에곤 실레의 퀭한 눈빛이 떠오른다. 그러다가 곧 히틀러는 사라지고 눈을 가리고 싶을 만큼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에곤 실레 도판(圖版)들이 눈앞을 스쳐간다. 닫힌 문과 좁은 침상의 드로잉에 '이 오렌지만이 유일한 빛이었다네'라는 제목이 붙어있어 깊은 암흑의 내면을 지녔구나 혼자 짐작했던 화가, 검은 미래 전망 속에서도 세계를 바꾸고 싶었던 영혼!

잠시 달이 구름 속에 숨는다. 훌쩍 소주를 입에 털어넣은 녀석이 담배를 손가락에 꽂은 채 소주를 따른다. 형, 제가 왜 이렇게 건방진 척 하는지 아십니까. 예술가에겐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내면의 빛이 있다고, 그것 때문에 나락에 떨어져도 행복할 것이라고도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최선을 다하라고, 예술가로서 최선을 다할 수 없는 상황에 몰리는 것과 최선을 다 하지 않고도 박수를 받는 것을 가장 수치스러워 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덜커덩 트럭이 지나간다. 윗옷을 걸어놓은 의자가 기우뚱거린다. 이 장면과 닮은 그림엔 '예술이란 현대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다'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던가. 구보 씨는 말을 돌려 에곤 실레의 그림을 묻는다.

죄수복 같은 붉은 옷을 입은 사내 드로잉엔 '예술가를 방해하는 것은 범죄에 해당된다. 그것은 이제 막 싹트기 시작하는 삶을 죽이는 것이다!'라는 긴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여전히 담배를 쥔 손으로 소주잔을 든 진지한 녀석의 등뒤로 달이 환하게 다시 몸을 드러낸다.

박미영(시인.대구작가콜로퀴엄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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