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대 중반, 문인예술가들의 단골 막걸리집인 옥이집. 조기섭·전재수 시인과 술을 마시던 권기호 시인이 다소 거친 기질의 전재수를 일찍 보내기 위해 일단 술자리를 파하고 술집을 나왔다.
얼마 후 다시 옥이집에 들어갔는데, 자신을 빼돌리려는 낌새를 알아챈 전재수가 뒤따라 들어오고 말았다. 기분이 상한 전재수의 항변이 시작됐다. "×× 이럴 수가 있능기가?" 욕설과 함께 권기호를 방안으로 밀어 넘어트리기에 이르자, 보다못한 조기섭이 개입했다.
"니는 선배도 없나?" 뒤이어 조기섭과 전재수의 완력다짐이 시작됐다. 그런데 조기섭이 전재수를 업어치기해서 오른팔로 목조르기에 들어갔다. 숨이 막힌 전재수는 순간 조기섭의 오른쪽 가슴을 물어버렸다.
비명과 함께 몸싸움은 그렇게 유혈극으로 끝이 났다. 그날 이후 조기섭은 "나는 가슴이 세 개다"라며 멋쩍은 웃음을 지었고, 자신의 표현대로 그 '질박한 훈장'을 가슴에 달고 살아왔다. 물론 옥이집에서 사단이 벌어진 그 이튿날 전재수는 공군 장교 정복차림으로 대봉동 이천교 부근 조기섭의 집에 찾아와 정중히 사과했다.
조기섭은 이렇게 울퉁불퉁 술을 마시고 다녔다. 오죽했으면 시인의 어머니가 "선상이 술을 저리 마시고 우예 아를 가르치노?"라는 외아들에 대한 염려의 말씀을 남겼을까.
조기섭(曺己燮.76) 시인은 고려대 국문과 시절 온몸으로 겪었던 전쟁의 상흔과 비극이 그를 문학의 길로 이끌었다. 피란문단 시절 대구에서 조지훈을 만나 시와 삶의 스승으로 삼았고, 향촌동 막걸리집을 드나들며 풍류를 배웠다. 그때부터 대구문인들과의 교류가 시작됐다.
그는 취기가 오를수록 자꾸만 목소리가 높아진다. 기가 여린 여류문인들이 옆에 있다가 오줌이라도 찔끔거릴 만큼 고함소리가 예측불허로 튀어나온다. "가마이 있거라 안카나. 이건 리얼한 이야기야. 생생한 사실이야."
봇물 터지듯 하는 고함과는 달리 그의 주도(酒道)는 흐트러짐이 없다. 과연 조지훈의 제자이다. 조기섭은 호방하고 강직하면서도 온아하고 관대한 성품을 지녔다. 도광의 시인은 "유신시절 독재정권에 공공연히 저항한 지식인이면서, 화왕산 기슭에 억새꽃 이우는 청람빛 가을을 머금은 시인"이라고 했다.
조기섭은 71년 출간한 첫 시집 '바람의 연가' 후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내 시작(詩作)은 인생과 현실에 대한 강한 반발과 연민의 방황 속에서 회임된 것이다. 특히 전쟁의 비참은 내 포에지의 깊숙한 모태가 되었다.'
전상렬 시인은 생전에 "박훈산 시인이 이중섭의 그림을 빌려가서 돌려주지 않아도 체념하고 말았으며, 정석모의 취중 독설을 이해했고, 자칭 독립군인 최고의 아픔도 껴안을 줄 알았다"" 조기섭의 두목형 기질과 연민의 정을 거론한 적이 있다.
조기섭과 전재수의 옥이집 혈투(?)를 능가하는 대구문단의 활극이 또 있었다. 78년 초 이우출과 김원중 시인의 문협 회장 선거전이 한국문협의 인준거부와 재선거의 곡절을 겪었을 때 소설가 이수남(李秀男.63)은 김원중을, 시조시인 김모씨는 이우출을 지지한 문인이었다.
그 와중에 술자리에서 만난 두 사람이 언쟁을 벌였고, 술김에 감정이 격해지자 기어이 몸싸움으로 비화된 것이다. 그런데 김모 시인이 이수남의 손가락을 깨무는 바람에 유혈극을 빚고 말았다.
결국 손가락 수술을 하고 소송까지 제기하는 사단이 벌어졌는데, 작가 이수남의 손가락은 지금도 그 상흔을 지니고 있다. 고교시절 문예반장 출신이기도 했던 두 문인은 이렇게 아픈 기억을 가슴 한 가장자리에 묻고 살아온 것이다.
이수남은 술자리가 막 시작될 무렵에는 마치 샌님처럼 얌전해, 있는지 없는지도 잘 모를 정도이다. 그러나 술판이 무르익고 취기가 오르면 상대방을 호칭하는 그 특유의 말이 기습적으로 튀어나온다.
"쌔꺄 쌔꺄..." 그리고는 평소 친분있는 후배들에게는 "쌔꺄, 너 나 좋아해?"라고 되묻기 시작한다. 그러나 술자리에서 발동하는 이수남 특유의 우정과 애정의 표현에 주변 사람들은 그저 즐거울 뿐이다. 누구도 작가 이수남의 이 귀여운(?) 술버릇을 탓하는 문인은 없다.
작가 송일호(宋一鎬.68)는 영원한 문학소년이다. 고희를 바라보는 나이에도 첫사랑 이야기에 얼굴을 붉힐만큼 순수한 감성을 지닌 문인이다. 취기가 오를수록 발그레해지는 동안(童顔)과 웅변가답게 높은 톤으로 치닫는 목소리가 그의 무구한 심성을 여과없이 드러낸다.
송일호는 50년대 말 장편소설 '여배우'를 출간하면서 문단에 나왔고, 64년 '그날이 오기까지'란 작품으로 일간지 신춘문예에 당선됐다. 그는 최광열과의 남다른 인연을 떠올리며 독특한 고음조(高音調)의 너털웃음을 연발한다.
"최광열 선생에게 일간지에 연재할 원고 교정을 부탁했는데 한달이 넘도록 오리무중이라.... 신문사의 독촉에 시달리던 통에 흑다방(경상감영공원 인근)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단 한 자도 안고쳤더라카이..."
악연(?)은 계속됐다. 62년 4월 제1회 신라문화제 때 경주극장에서 전국웅변대회가 열렸는데, 대학부로 출전한 송일호가 최고의 성적을 거뒀다. 그런데 심사위원장이던 최광열이 대회의 권위를 세워야 한다면 그를 1등에서 제외시켜버린 것이다. 송일호는 사실 한달 뒤 대구에서 열린 5.16기념 전국웅변대회에서 1등상을 받을 만큼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당시 1등 상품은 둥근 자명종 시계로 중국집에서 사흘간 술판을 벌일 수 있는 귀한 물건이었어." 송일호의 묵은 감정은 이듬해에 폭발하고 말았다. 63년 KG홀(현재 시민회관 자리) 지하 화랑에서 열린 어느 전시회에서였다.
숱한 문인문객들이 모인 자리에서 도라지 위스키에 취한 송일호가 최광열을 향해 "죽인다"고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자, 동작이 굼뜬 최광열이 삼십육계 줄행랑을 치는 촌극을 연출했다.
그 후 신춘문예 당선이래 5년에 걸친 가난한 작가생활에 지친 송일호는 출판사를 하던 하임수씨를 찾아가 "돈을 빌려 달라"고 했다가, "문학이 밥 먹여주냐"는 대답과 함께 뺨을 왕복으로 얻어맞았다.
"깡소주 2병을 비우고 연탄불에 그동안의 습작 원고를 죄다 연기로 날려버렸지. 다시는 문학을 안하겠다고..." 그 후 서점을 운영해서 경제적으로 다소 여유를 가지게 되었는데, 송일호는 그때 태워버린 작품이 지금도 아깝기만하다.
작가 송일호가 서점을 하면서 문단에서는 한 발 물러서 있었으면서도 문학에의 열정을 버리지 않았고, 문인들을 음으로 양으로 도와준 정리(情理)를 두고 도광의 시인은 존중의 뜻을 표하기도 했다.
조향래기자 bulsaj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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