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대구대교구 주교좌본당 계산천주교회는 모든 것을 따뜻하게 품어주는 어머니이다. 결코 자신을 내세우는 법이 없는 어머니들처럼, 겸손하게 낮은 곳에 두 발 딛고 서서 찾아오는 이들을 언제나 꼬옥 안아준다.
"그래, 그래…. 말하지 않아도 돼. 난 네 심정 알아."
왠지 계산성당에 오면 억울하고 답답한 마음에 그저 와서 실컷 울기만 해도 머리가 맑아지고, 성체를 조배하며 묵주 기도만 드려도 성난 파도처럼 일렁이던 마음이 고요해진다. 그래서 계산성당에는 조각난 마음, 상처난 영혼, 사별한 슬픔을 안고 찾아오는 이들이 줄을 잇는다. 그런가 하면 결혼으로 제2의 출발을 기하려는 젊은 부부들의 혼배식도 잇따른다. 갖가지 아픔이나 슬픔, 혹은 기쁨이나 소망을 안고 찾아왔던 이들이 성당을 나설 때, 각기 다른 입장에서 다른 각오로 세상과 맞설 용기를 갖게 된다. 놀라운 치유의 기적을 보여주는 루르드의 성모를 주보로 모신 계산성당은 그렇게 믿음의 한가운데를 차지하며 지난 120년을 우리와 함께해왔다.
◇ 신앙의 밤이 없는 성당
지난 6월 6일로 본당 설정 120주년을 맞아 유물사료관을 개관하고, 초본당적인 성서모임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21세기형 사목을 시도하고 있는 대구 계산성당에는 딱 두 가지가 없다. 그 중 하나는 밤이 없다. "세상만물이 다 밤을 맞는데, 계산성당에는 밤이 없다니 무슨 소리야?"라고 되물을 수 있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시간적인 밤이 없는 것이 아니라 교우의 발길이 뚝 끊어지는 '신앙의 밤'이 없다고 해야 옳다. 한밤중에도 연도를 드리는 교우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져, 어둠에 잠긴 성당 마당은 죽음으로 인한 별리를 신앙으로 이겨내려는 서성거림으로 잠들지 못한다. 기나긴 밤을 지나온 새벽에도 마찬가지로 계산성당은 깨어 있다. 어둠이 물러가는 시각, 성당은 환히 불을 켠 채 미사에 참례할 신자들을 기다리고 서 있다.
나머지 하나는 계산성당에는 미사가 없는 날이 없다는 것이다. 보통 월요일에는 미사가 없는 성당이 대부분이지만 계산성당은 그렇지 않다. 월요일에도 있고, 주일 밤 늦은 시간에도 직장인들을 위한 미사가 올려진다. 황혼에는 하루를 수고한 이들이 피곤한 몸을 이끌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유리화(성화 스테인드글라스)가 은은한 빛을 발하는 계산성당을 찾는다. 성당에 들어서면, 세상의 죄를 대신하여 죽음을 당한 십자고상이 엄숙하고 아름답게 교우들을 맞는다.
◇ 계산성당 종소리, 행복해요
보통 계산성당에는 오전 6시, 낮 12시, 오후 6시면 첨탑의 종이 울린다. 겨울철이면 첨탑에서 울려퍼지는 종소리가 어둠을 쫓아내지만, 여름철인 요즘은 사위가 환히 밝아지는 까닭에 삼종 소리가 경쾌하게 들린다. "땡땡땡, 땡땡땡, 땡땡땡~" 계산성당의 종소리는 한때 앞산까지 울려 퍼졌다. 요즘은 사정이 달라졌다. 높은 건물이 들어서 종소리를 막고, 소음이 심해지면서 멀리 나아가지 못한다. 그러나 매일 계산성당 종소리를 들으며 행복에 잠기는 이들도 적지 않다. 대표적인 인물은 국채보상운동의 선구자이자 초창기 천주교 대구대교구의 발전에 큰 역할을 했던 서상돈 아우구스티노이다. 내년이면 100주년을 맞는 대구국채보상운동 대표 김영호 전 산자부 장관은 서상돈 아우구스티노가 계산성당의 종소리를 들으며 죽게 돼 행복하다는 기록을 남긴 것으로 증언했다. 그 옛날 서상돈과 같은 독실한 신자가 아니어도 하루 세 번씩 어김없이 들려오는 영혼의 종소리를 기다리는 생활인은 너무나 많다. 그만큼 계산성당은 이미 우리 삶 깊숙이 자연스레 스며들어 있다.
◇ 1886년 대구본당 세워져
계산성당의 전신인 대구본당은 1886년 초, 조선대목구 블랑 주교에 의해 설정됐다. 한국천주교는 19세기 마지막 4반세기 동안, 엄청나게 커졌다. 병인박해 시기이던 1886년에 한국천주교인은 1만 4천여 명이었으나 1900년에는 4만 2천 명으로 늘어났다. 이런 교세를 감안, 블랑 주교는 대구를 영호남 사목의 중심지로 삼아 대구본당을 설정하고, 김보록(로베로) 신부를 초대본당 주임신부로 임명했다. 그래서 대구본당은 천주교대구대교구 계산성당의 효시이다. 대구본당은 처음 신나무골에 임시로 정해졌다. 신나무골에서 김보록 신부는 한티 교우촌을 포함한 사목관할지역에 성사를 집행했다. 1888년 김보록 신부는 새방골(대구시 서구 죽전동)로 거처를 옮겼고, 다시 1891년에는 경상도 지방의 실질적인 포교 중심지인 대구읍내로 진출했다. 대구시 중구 계산동 현재의 자리에 대구본당의 전신인 남산공소가 들어섰고, 1910년까지 영호남 지방에는 전주, 부산, 가실, 김천, 안대동 등을 포함한 18개 본당이 증설됐다.
◇ 대구대목구 설정되다
조선대목구 뮈텔 주교는 1910년 한반도의 남쪽 지역을 관할할 남방교구의 설정을 시사했고, 대구와 전주가 물망에 올랐다. 당시 전주에는 신유박해 때 숨진 순교자 유항검(1756~1801) 등의 활약으로 신자수가 상당수에 이르렀고, 순교자가 많아서 대목구 설정에 유리한 입장이었다. 그러나 조선대목구가 서울대목구와 대구대목구로 설정되면서, 대구에 대목구가 설정됐다. 초대 감목은 안세화 드망즈 주교였다. 전주를 제치고 대구에 경상도 전라도 양도를 관할하는 대구대목구가 설치된 것은 교통, 큰 성당, 신자들의 열의 세 가지 요인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첫째 대구에 철로가 지나가고, 교통이 편리했다. 둘째 대구에는 큰 성당인 계산성당이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을해박해(1815년) 기해박해(1827년) 병인박해(1866년)를 거치면서, 더 영성이 강해진 신자들의 열의가 크게 작용했다. 교구로서 갖추어야 할 시설이 거의 없는 상태로 부임한 드망즈 주교는 성모님께 이렇게 허원했다. "주교관, 신학교, 주교좌 성당 증축 등을 다 이룰 수 있다면 교구의 가장 아름다운 장소를 성모께 봉헌해 그곳에 루르드의 성모 동굴대로 성모당을 세워서 모든 신자들이 순례하도록 하겠습니다."
최미화 편집위원 magohalmi@msnet.co.kr
사진·정우용기자 vi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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