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석(43·동구 신기동)·조정희(38) 씨는 '잉꼬 부부'다. 조 씨는 두 눈을 잃은 남편의 손과 발이 되어줘야 하지만 이를 불평하는 법이 없다. 바깥출입이 힘든 남편과 마주 하는 시간이 많아 자연스레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됐고 부부간 정(情)은 더욱 깊어졌다.
권 씨는 희귀질환인 베체트병을 앓고 있다. 면역기능 이상으로 입, 피부에 염증이 생길 뿐 아니라 위와 장에 궤양, 관절염이 동반되는 병인데 아직 마땅한 치료방법이 없다. 특히 눈에 염증이 생기는 경우 실명에까지 이를 수 있다. 권 씨가 그런 경우.
조 씨가 남편과 결혼한 것은 지난 1993년. 20살 무렵부터 베체트병을 앓아온 권 씨는 이 때 이미 시력을 거의 잃어 사물의 형체만 흐릿하게 보일 뿐이었다. 알고 있는 의사가 곧 실명할 거라고 귀띔해줬지만 조 씨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처음 봤을 때 '이 남자가 내 사람'이라는 느낌이 왔죠. 연민도 느꼈지만 무엇보다 착한 사람이라는 점에 마음이 가더군요. 남편은 자기가 눈앞이 완전히 보이지 않을 걸 알았다면 절 떠나보냈을 거래요."
두 사람의 데이트 장소는 주로 병원. 병이 진행되면서 권 씨가 수시로 병원을 드나들어야 했던 탓이다. 한참 혈기왕성할 20대에 찾아온 병마는 권 씨의 몸 뿐 아니라 마음도 괴롭혔다. 그때마다 조 씨는 절망감에 몸부림치는 권 씨를 따뜻하게 보듬어 안아줬다.
그러나 현실은 힘들었다. 스테로이드제, 진통제 등 많은 약을 삼키며 치료를 받았지만 권 씨는 결국 8년 전 시력을 완전히 잃었다. "고통에 못 이겨 비명을 지르다 보면 어느새 응급실에 실려와 있곤 했죠. 이대로 죽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했습니다. 아내가 없었다면 견디기 어려웠을 겁니다."
집 문제도 부부를 괴롭혔다. 은행에서 전세자금을 대출받아 조 씨 어머니 집에 살림을 차렸다. 하지만 조 씨 어머니가 보증을 서준 친척이 사업을 하다 부도를 내는 바람에 집이 통째로 넘어가 버렸다. 부부도 전세보증금을 날린 채 짐을 쌀 수밖에 없었다.
권 씨의 병이 계속 진행된 탓에 집안 생계는 아내 조 씨가 짬을 내 식당일을 하며 책임졌다. 팍팍한 현실 속에서 부부에게 위안이 돼 준 것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세 딸 지혜(가명·13·중학교 1년)와 수진(가명·11·초교 5년), 미진(3)이.
특히 큰 딸 지혜는 속이 깊다. "5살 무렵부터 제가 일하느라 바쁠 때면 남편 손을 잡고 병원에 데려가곤 했어요. 지혜는 반에서 1등을 놓치지 않을 정도로 공부도 잘 해요. 형편이 어려워 과외학원 한 번 못 보냈는데…."
얼마 전 집 주인으로부터 집을 비워달라는 말을 들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식. 현재 기초생활수급권자인 부부의 수입은 정부 보조금 100여만 원이 전부. 권 씨 병원비도 대야 했기에 모아놓은 돈도 거의 없다.
이 와중에 주택공사에서 동구 지역 수급권자 50명을 심사, 장기저리로 전세금 5천만 원을 대출해준다는 소식이 들렸다. 다행이 당첨됐지만 기존에 있던 주택 대출금을 갚지 않으면 무효라는 조건에 말문이 막혔다. 처음 집을 구할 때 은행에서 빌린 900만 원을 아직 갚지 못했기 때문.
길바닥에 나 앉아야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밀려온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다. 아직 어린 세 딸이 있기 때문.
"남편과 함께 슬프고, 함께 기쁠 수 있어 행복합니다. 지금 시련도 어떤 식으로든 이겨낼 수 있을 거예요. 다만 부모가 스스로 서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해 아이들에게 미안할 따름입니다(아내 조성희 씨)."
"셋째 딸이 20살 될 때까지만 살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뜨기 전엔 아내에게 '나와 살아줘서 정말 고맙다.'고 말해주고 싶어요(남편 권오석 씨)."
채정민기자 cwolf@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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