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글이 흐르는 풍경] 독립군 할아버지 사라지다

입력 2006-06-27 08:17:06

"이 몸이 한창 젊었을 때는 말이야, 끄륵, 허허 벌판 만주 땅, 그 눈바람 속을 날아댕깄지. 밤낮으로 왜놈들과 붙어 싸웠는데 말이야, 봉오동 밤 전투에서 맨주먹으로 총을 든 왜놈 11명을 때려눕혔더니 대장이 나를 장비라고 불렀다고. 삼국지에 나오는 장비 말이야, 수염이 시커먼. 끄르륵. 그란데도 이누무 세상이 나를 몰라보고 말이야…"

산꼭대기 판잣집에 혼자 사시는 할아버지는 술만 취하면 아무나 붙잡고 케케묵은 독립군 이야기를 쏟아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할아버지의 술에 쩔은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동네 아이들도 할아버지를 돈키호테라 불러댔고, 심지어는 동네 똥개조차 '또 술주정이군' 하며 피해 다녔습니다.

지난 구정 때였습니다. 마을 노인회관에서 벌어진 술잔치 끝에 할아버지가 또 만주벌판 눈보라를 꺼내는데 옆에 있던 곰배 할아버지가 '그놈의 독립군 타령 좀 고만하게. 누가 자네 말 믿기나 하는 줄 알아?' 하고 핀잔을 주었습니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자네가 시방 뭐라 캔노? 뭣이 우째? 거짓뿌렁이라고. 야, 이 영감태기야! 니 같은 놈들이 따시한 방구석에서 마누라 끼고 평안히 잠들 때, 이 몸은 만주 벌판에서 하룻밤 백리 길을 뛰어다니며 독립운동을 했다. 니 오늘 잘 걸려들었다. 안 그캐도 하직하고 싶은 세상…"

벽력같은 말로 술판을 뒤엎고 업어치기 한판으로 곰배 할아버지를 마당에다 메다 꽂아버리고는 저무는 동구 밖으로 훌훌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올 봄, 동네 어른들을 실은 효도관광 버스가 계룡산 진달래 밭을 빠져나와 천안의 독립기념관에 들렸을 때의 일입니다. 기념관에 전시된 독립군 확대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던 이장님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는 옆에서 구경하던 동네 어른들을 숨이 차게 불렀습니다.

"어르신들, 저 사진 귀퉁이에 서있는 사람, 혹시 눈에 익지 않아요?"

"글씨,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인데…"

"비키봐라. 그라고 보이…"

"맞다, 맞아! 우리 동네 독립군이네."

"어디 보자. 참말로 맞네. 저 찢어진 두 눈과 불뚝 나온 광대뼈하고…"

"만세! 만세! 진짜 광복군 만세다. 우리 동네 광복군이 저기 있다!"

마을 어른들은 그 사진 앞에 모두 모여 만세를 불렀습니다.

효도관광을 마치고 돌아온 이장님은 부지런히 관청을 들락거리며 할아버지가 진짜 독립군임을 증명하고 나라의 장부에 할아버지 이름 석 자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독립군 증명서와 함께 위로금을 찾아 들고 하루에도 몇 번이나 산꼭대기 판잣집을 들렀으나 마당의 웃자란 망초대만 고개를 흔들어댈 뿐이었습니다. 동네 사람들까지 나서서 사방팔방 십육방으로 수소문해보았지만 할아버지의 행방은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김동국(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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