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이다. 잊었던 아픔이 되살아나는 계절이다. 때가 되면 도지는 가슴앓이처럼 이 맘 때면 울산 큰 조카는 또 울적할 것이다.
징집영장을 받고 나간 지 사흘 만에 전사 통지서가 날아들었다는 사촌 오라버니의 얼굴을 알 수는 없지만, 늙은 조카의 얼굴이 오라버니와 판박이라니 어쩐 지 조금 슬픈 얼굴일 것 같다.
흰 개망초꽃이 계절을 알아차린 듯 소복을 하고 산과 들을 덮고 있다. 불운했던 시대, 징집되었던 오라버니가 살아 있다면 칠순을 넘긴 할아버지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미 아픈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없다.
오라버니의 희생이 역사를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이루어놓았던 가정은 전장의 폐허처럼 풍비박산이 되었다. 젊은 어미는 개가를 하고, 아비 없는 조카는 큰아버지 집에서 성장을 하였다.
가난했던 시대, 소꼴을 해다 나르던 그 소년은 성인이 되어서도 내내 힘겹게 살아야했다. 일찍 장가를 들었지만, 결핵으로 아내를 잃고 남은 자식들 간수를 못해 유목민처럼 떠돌았다.
불운은 가업처럼 대를 잇는 것인지, 아비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그는 오래도록 휘청거렸다. 아비에 대한 기억이 없는 그는 내내 아비의 정을 그리워하였다. 어미도 아비도 모두 자신을 버렸다는 생각이 오래도록 그를 지배했던 것 같다.
다시 가정을 꾸리고 사람 노릇을 하며 살기까지 그의 오랜 방황은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허기였을 것이다.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고 그래도 살아남은 사람은 천형처럼 그리움을 가슴에 묻고 산다. 유복자로 태어나 힘들게 생을 꾸려가는 늙은 조카를 보면서 남은 사람의 고통과 쓸쓸함을 읽는다.
아버지 없이 어머니 없이 군더더기처럼 살아온 그의 이력이 소아마비를 앓은 다리처럼 생을 절름거리게 했다. 이 땅의 아프고 슬픈 역사가 아직도 살아있는 아픔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한 시대의 불운이 한 가정을 깨트렸고, 한 사람의 일생을 바꾸어 놓았다. '아버지'라고 한 번 불러보고 싶다는 늙은 조카의 울먹이는 눈망울이 젖어드는 유월이다. 그리운 목소리는 그러나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처럼 허공에 흩어져 버렸다.
아비를 쏙 빼닮았다는 얼굴과 말투가 이 땅에 남겨놓고 간 유일한 흔적이다. 아비가 보고 싶거든 거울을 보랬다고 한다.
한 세대가 또 흘러가면 그 때쯤은 아픔이 삭아질까? 며느리를 보는 조카의 얼굴이 내내 우울했던 것도 힘겹게 살아온 그의 내력 때문이 아니었을까. 내내 측은한 아이로 가족들 가슴에 응어리로 남아있던 조카가 아프게 대를 이어가고 있다.
부모 없는 아픔은 대물림하고 싶지 않다는 그의 쓸쓸한 하소연을 들어주는 이 몇이나 있었을까? 미장공으로 벽돌공으로 스스로를 일으켜 세우던 그의 일생이 그의 가계를 일으켜 세우는 주춧돌이 되었다.
쓸쓸함도 외로움도 먼 이야기처럼 남의 이야기처럼 할 그 날이 어서 오기를 기다린다.
술이라도 한 잔 걸친 목소리로 안부를 묻곤 하더니 그가 요즈음 잠잠하다.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해 하소연하곤 하더니, 이제 그도 나이에 걸맞게 뿌리를 내린 것일까?
황영선(아동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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