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초, 영천 화산면 덕암1리. 여느 농촌 마을과 다르지 않게 이 곳도 가난한 마을의 대명사였다. 영천과 신녕, 하양 등지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길목이어서 행인들은 많았지만 마을 사람들은 끼니를 잇지 못할 정도의 가난에 허덕였다. 논 대여섯 마지기만 있으면 큰 부자 대접을 받을 정도였다.
마을 실개천을 사이에 두고 주막이 두 군데나 들어서 사람들은 허구헌 날 술타령에 노름판이었다. 여기에다 건달들은 마을을 지나가는 나그네들에게 시비를 걸어 돈을 뺏어 달아나기 일쑤여서 마을 인심은 사납기만 했다.
이런 덕암리에도 72년쯤부터 새마을 운동 바람이 불면서 주민들이 변해갔다.
"마치 신들린 사람들 같았단 말이야. 새마을 운동 뜻도 모르면서 새마을 운동한다면 모든 게 다 통하는 그런 시절이었어." 당시 이장이었던 이흥석(77) 씨의 기억이다.
쌀 보리 2모작을 하면서도 허기를 면하기엔 역부족이었던 주민들은 정부의 유실수 권장이 있자 마을 뒷산의 소나무와 잡목을 베어내고 밤나무를 심는 한편, 장기계획으로 뽕밭을 만들어 일년에 두차례씩 누에고치를 생산해 시장에 팔았다. 농가소득이 오르자 마을 안길 5군데는 물론 농지까지 소달구지가 다닐 수 있도록 넓혔다. 물론 마을안길 확장때 주민들은 자기 땅을 그저 내놓다 시피했다.
새마을운동 4년여만에 농가 소득이 가구당 연 40만 원에서 100만 원대로 늘어나는 등 모범마을로 알려지자 당시 국무총리였던 김종필 씨가 400만 원의 대통령 하사금을 들고 방문했고 그 기록은 마을회관 마당의 비석으로 남아있다. 시상금으로 주민들은 공동으로 박하나무를 심었으며, 그 열매 기름을 식품첨가제로 내다팔아 다시 엄청난 수익을 올리게 됐다.
1970년대 초만 하더라도 농촌 마을의 가구당 소득은 덕암1리 처럼 40만 원 내외였다. 그 정도론 먹고 살기 조차 어려워 대다수 농가의 경우 무엇보다도 끼니해결이 급선무여서 자녀들의 교육에 신경쓸 겨를도 없었다. 이에 따라 대다수 농가 자녀들은 국민학교만 마친 뒤 농사에 나서거나 부농가의 일꾼으로 보내졌다. 사정이 좀 나은 농가는 중학교를 졸업시킨 뒤 도시 공장으로 취직시켜 돈을 벌어오게 했지만 고교까지 진학시키는 농가는 극히 드물었다. 지금처럼 교통망이 좋지않은 터라 같은 군내에서도 읍·면소재의 고교에 보내기 위해서는 방을 얻는 등 많은 비용을 들여 유학을 보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러던 중 새마을 운동이 일어나자 농가들이 쌍수를 들어 환영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새마을 운동의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하던 1970년대 중·후반부터는 입식한 소를 키워 대학까지 보내는 농가가 하나, 둘 생기기 시작했고 80년대엔 마을마다 대학생이 1~3명에 이를 정도가 됐다. 이 때 소를 팔아 보낸다고 대학을 '우골탑'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문경읍 하초리도 가난한 마을에서 새마을 운동을 통해 5년만에 농가소득이 두 배 이상 늘어난 곳이다.
이곳은 당시 79가구, 444명이 사는 중규모로 주민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 돼 새마을 운동에 동참한 결과 지붕이 초가에서 슬레이트·기와로 바뀌었다. 가구당 한사람씩 6개월간 의무적으로 부역에 참여, 폭 2m 흙길의 마을 진입로 600m를 6m 시멘트로 확장, 포장했다. 또 냇가를 따라 구불부불했던 진입로 직선화를 위해서는 주민들이 편입부지를 아무런 조건없이 내놨다. 마을 진입로가 확장되자 동력경운기 왕래가 가능해졌고, 이에 따라 농산물 운송과 영농기계화가 급속도로 진행돼 영농효율이 극대화하면서 농가소득은 높아만 갔다.
당시 여름철이면 주민들이 제 각기 지게에 낫을 꽂아 산으로 올랐고, 집집마다 집채만한 퇴비더미가 등장하고 논에는 지력을 높이기 위한 객토 작업으로 다수확을 예고했다. 당시 쌀과 담배 농사가 주 수입원이었던 하초리는 농산물 운송능력이 높아지고 지력까지 보강되면서 때 마침 재배한 통일벼가 성공, 기존 벼보다 2배가량의 소출을 안겨줬다. 여기에다 73년 공급된 전기로 인해 잎담배 농가에서 야간작업이 가능해지면서 종전에 비해 생산량이 50% 이상 늘면서 마침내 '부촌의 꿈'이 이뤄냈다. 이때 군의 자재지원에다 주민들의 부역 참여로 3개월만에 마을 간이상수도가 완공되면서 물을 길어나르던 노동력이 농업생산성을 높이는 쪽으로 돌려지고, 주택개량 사업으로 짚이 전량 소먹이로 이용되면서 가구당 사육 두수가 종전에 비해 2배로 늘어났다.
이 마을 홍성광(67) 씨는 "부녀자들은 아이들을 마을 뒷산 중턱에 소와 함께 뛰어 놀게 한 뒤 부역에 참여했고, 하루 불참한 집에서는 다음날 두 사람이 나오는 등 주민 모두가 새마을 사업에 열성을 보인 결과 잘 사는 마을이 됐다."고 말했다.
현재 87가구, 244명이 살고있는 이 마을은 80년대 초부터 벼와 담배에서 사과 농사로 주작목을 바꿔 농가마다 연평균 3천만 원의 소득을 올리는 등 부자마을의 맥을 이어오고 있다. 지상만(49) 이장은 "젊은층들이 대도시로 빠져나가버려 지금은 초교생이 5명에 지나지 않고 주민 수는 70년대에 비해 절반 수준으로 줄었으나 주택이 들어서고 소득이 높아 가구수는 오히려 늘어났다."고 말했다.
황재성·이채수·박진홍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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