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런 마을'이 '형형색색 새마을'로
1973년 무렵의 울진 기성면 망양리. 당시 77가구 439명이 살았던 이 마을에도 새마을 운동 바람이 불었다. 초가지붕을 걷어내고 슬레이트 지붕을 이어야했지만 농토가 별로 없었던 탓에 짚을 구하기가 무척 힘들었다. 그래서 마을 주민들은 슬레이트 지붕을 선택했다. 기와는 비싸고 함석은 염분에 약해 쉽게 녹슬기 때문이었다.
농민들 스스로 지붕개량에 나섰지만 슬레이트를 구하려면 손수레를 끌고 50여 리나 되는 울진읍의 철물점까지 흙먼지가 펄펄 날리는 비탈길을 가야했다. 주민들은 새벽밥을 먹고 삼삼오오 집을 나서 어둠이 내릴쯤 마을로 돌아왔지만 지붕개량을 하는 날이면 잔치가 벌어졌다.
"말도 마. 요즘 생각해 보면 그땐 정말 사는 게 아니었어. 집이라고 해야 방 1칸에 정지(부엌)하나 달린, 기어 들어갔다 기어 나오는 오두막집이었지. 그래도 지붕개량 하는 날은 잔칫날이었지. 바다에서 파래를 뜯어 가마솥에 쪄서 간장에 찍어 먹는 게 고작이었지만 동네 아낙네들 모두가 함께 점심을 준비했어." 이 마을 박춘흥(78)·이문열(84) 할머니의 기억이다.
1970년대만 해도 매년 가을 추수가 끝나면 농가마다 볏짚으로 지붕을 새로 덮는 것이 일 년 대사였다. 1970년에는 전국 250여 만 농가 가운데 80%가 초가지붕이었다. 당시 농촌에서는 볏짚의 대부분이 지붕으로 올라가는 바람에 겨울철 소먹잇감이 모자라 온 가족이 동원돼 풀을 베어 말려 월동용으로 보관해야만 했다.
때마침 새마을 사업으로 전개한 마을 안길 넓히기는 곧 바로 농촌 지붕을 바꾸는 전기가 됐다. 도로확장과 동력경운기의 보급으로 하천변의 모래와 읍·면소재지로부터 시멘트를 마을까지 운반할 수 있게 되자 기왓장을 만드는 틀을 공동으로 구입, 이웃끼리 시멘트기와를 직접 만들었다. 또 지붕개량을 한 뒤 초록·주황·파란색 등 원색의 페인트를 칠해 마을 색깔을 바꾸는 게 유행처럼 돼 버렸다.
피죽도 먹기 어려운 시절 빚을 얻어서까지 지붕개량에 나선 것은 정부와 공무원들의 강력한 권유도 있었지만 눈에 띄게 달라지는 주거문화 변화 그 자체에 대해 주민들이 감동한 면이 컸다.
이 같은 추세에 따라 모든 사람들은 지붕을 초가에서 기와나 슬레이트로 바꾸는 것이 마치 새마을 사업의 전부인 양 생각할 정도가 됐으며, 1975년에는 전국의 거의 모든 농가의 지붕이 기와나 슬레이트로 바뀌면서 농촌의 모습은 몰라보게 달라졌다.
통일벼 재배 권장과 마찬가지로 지붕개량에도 공무원들의 힘이 크게 작용했다. 정부지원이 없는 100% 주민 자부담 사업이었기 때문에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시절에 빚을 내 선뜻 지붕을 개량하려는 사람들이 없었다. 더 나아가 공무원들은 담당부락별로 실적경쟁을 하다 보니 자재를 먼저 공급받기 위해 철물점 사장에게 로비를 하는가 하면 지붕개량비 조달에 보증을 서주기까지 했다.
1970년대 지붕개량 업무를 봤던 최기탁(60) 전 울진군 기획감사실장은 "공무원별 담당 마을을 지정, 실적 점검과 보고를 하도록 해 독려한 것도 있지만 초가지붕이 근사한 슬레이트 지붕으로 변한다는 사실 그 자체에 매료돼 밤늦도록 주민들을 만나 막걸리잔을 기울이며 설득하고도 힘드는 줄 몰랐다."고 했다.
이 무렵 정부로부터 지붕개량 시범마을로 선정된 의성 비안면 서부1리(속칭 구비안)는 100여 가구가 슬레이트지붕으로 바뀌었지만 정부 관계자가 지붕이 청색이어서 너무 어둡다고 지적하자 오렌지색으로 다시 칠하는 일도 벌어졌다. 가음면 현리에서는 흙담장 개량을 둘러싸고 농민들과 공무원간 주먹이 오가는 사태도 벌어졌다. 면 직원들이 흙담장 위의 짚덮개를 쓰러뜨리자 이를 막은 주민들과 주먹다짐이 벌어진 것.
오갑희(59) 가음면장은 "당시엔 공무원들이 마을을 돌며 흙담의 짚덮개를 헐면서 주민들과 주먹다짐을 벌인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주민들이 호응, 흙담을 허물고 콘크리트에 기와를 얹어 단장한 담이 등장한 것"이라고 말했다.
1975년 영주 단산면에 근무했던 강진성(53) 영주시 정보통신담당관은 "지붕개량을 두고 조상이 물려준 집에 손댈 수 없다며 완강히 버티는 노인들을 설득하기 위해 산림공무원들까지 동원해 집앞에 불법으로 쌓아놓은 나뭇더미를 빌미로 항복을 받아내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당시 군 새마을계에 근무했던 박춘흠(59) 봉화군 총무과장은 "지붕개량사업은 75, 76년도에 가장 활발하게 추진됐다. 그러나 슬레이트 지붕 개량비로 공무원 한 달 봉급 정도인 5만, 6만 원을 자부담해야 하는 것에 부담을 느껴 멀쩡한 지붕에 손대지 말라며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며 "공무원들이 지붕을 강제로 벗겨내고, 슬레이트를 덮는 일을 거들기도 했다."고 말했다. 황재성·황이주·이희대·마경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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