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거실에 원본(原本) 그림을 걸어놓았다. 삶은 문화를 통해 풍부해짐을 믿어 온 나로서는 고호나 피카소에 비하지는 못하지만 이름 있는 화가의 그림을 소유하게 된 것 자체가 뿌듯한 사건이었다. 지금은 내 삶의 공간에 걸리고 세워진 그림들 속에서 밤바다 향내를 맡기도 하고 눈 속 소나무 좁은 길에서 방황하기도 하며 매화꽃 아래에서 봄 밤(夜)의 정취에 빠져들기도 한다.
그림이나 음악이 없는 우리의 삶을 상상해보라! 특히 도시인에게 그림이나 음악은 삶의 은유이자 본래(本來)의 세계로 가는 통로이다. 그런데 그러한 예술을 내 삶 가까이로 끌어들이려면 만만치 않은 돈을 필요로 하는 게 문제다. 호당 10만원을 훨씬 넘는 그림 값이나 최소 수 만원을 들여야만 볼 만한 연주회 자리 하나를 예약할 수 있는 현실 앞에서 예술은 허구가 되어버린다.
한국 사회에서 지방은 변방의 의미가 강하다. 중앙에서 비껴나 있고 언제나 이류를 벗어날 수 없는 고정성을 지닌다. 기능적 차별화 보다는 계층적 차별화를 통해 이루어진 중앙과 지방간의 관계가 문화영역까지 확대되어 지역민들은 문화 향유에 있어서 하층민임을 절감한다. 이들은 문화수혜에 있어서 상류층으로 나가고 싶어도 경제적 능력의 한계로 좌절한다.
과연 문화는 시장의 원리에만 맡겨둘 수 있는 걸일까. 수요에 따른 공급이 창출되고 공급은 또 다른 수요를 낳아 결국은 사회적으로 더 많은 이익을 가져다준다는 자본주의의 선(善)이 문화 영역에서도 실현될 수 있는 것일까. 정책은 시장의 원리에 맡겨두면 더 많은 해악(害惡)이 나타날 것이 분명한 경우 시도되는 의도적 행위이다.
그런데 문화영역에서 이러한 정책행위는 지역정부가 떠맡아야 한다. 더군다나 문화도시를 표방하는 지역정부일수록 지역민들의 문화적 혜택을 고민해야 한다. 출발점은 일상 속에서 편안하게 수용할 수 있는 문화기회의 제공에 있다. 여기에는 사회정의론의 대표자 롤즈(J. Rawls)의 원칙이 유효하다. '차등은 불평등한 조건에 있는 사람들의 평등을 목적으로 하는 경우에만 정의롭다'라는 그의 원칙은 지역정부 문화정책의 근간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런데 지역정부의 문화정책은 수용자의 문화수혜 비용을 직접 지원하는 것보다는 문화 생산자들을 지원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이를 위해 지역 내 유능한 예술인들에 대한 지원 프로그램 구축이 필요하다. 이들은 최저생계비 마저 마련되지 못하는 일상 속에서 누구에게나 다가가는 예술이 아니라 자신의 예술을 소비할 수 있는 소수인에게만 다가가는 예술에 집착하다보니 현실적으로는 점점 더 가난해지고 있다. 그것도 지방이라는 벗어날 수 없는 굴레를 뒤집어쓰고서….
오창우 계명대 미디어영상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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