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바지에 접어든 한나라당의 지방선거 후보 공천을 보면 아쉬움을 금할 수 없다. 주민을 위해 일할 사람보다 한나라당, 또는 지역구 국회의원에게 헌신할 사람이 후보로 정해진 경우가 적잖은 것 같다.
대구 한 기초의원 선거구에서는 이런 일이 벌어졌다. 공천신청자들 중에 지역구 국회의원이 공천을 주려고 작심한 사람이 있었다. 문제는 이 사람이 제출한 공천신청서에는 각종 전과사실이 기재된 범죄경력 조회서류도 한 뭉치나 됐다는 점이다. 결과는? 국회의원이 내정한 사람은 탈 없이 공천을 받았다. 도덕성을 철저히 따지겠다느니, 주요 범죄 전력자는 반드시 빼겠다느니 귀에 못이 박이도록 떠들어댔던 공천기준 같은 것은 온데간데없었다.
어느 광역의원은 이번 공천을 내심 자신하고 있었다. 지난 4년 동안 시민·사회단체들이 선정한 '의정활동 우수 지방의원'에 빠짐없이 이름이 오를 만큼 실적이 좋았기 때문이다. 당내에서도 문제 없을 것이라는 여론이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지역구 국회의원이 기초단체장 공천자를 정하는 과정에서 광역의원 공천자를 이 기초단체장이 추천하는 사람으로 바꿔 버렸다. 그 동안의 의정활동 실적에 대한 여러 호평 따위는 하루아침에 휴지조각이 돼버렸다고 탈락한 광역의원은 분개했다.
사실 위에 든 예는 빙산의 일각이다. 공천자 결정 잣대로 '국회의원 강추(강력추천)'라는 꼬리표가 중요하게 작용하지 않은 경우는 오히려 찾기 힘들다.
국회의원들도 상식이 있는 이들이다. 일반인보다 더 뛰어난 식견과 경륜을 자랑하기도 한다. 그런데 왜 이런 무리수를 강행할까?
이번 지방선거에서 처음으로 기초의원들까지 정당 공천을 받아 출마하도록 한 '지방의원 정당 공천제'가 문제의 발단이다.지난 2002년 지방선거 때까지 기초의원에게는 정당 공천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 국회의원들의 '내 사람 지방의원 만들기' 현상이 적었다. 정당 간판을 달고 나가는 것도 아닌데 굳이 좋은 사람을 배척해 반대자를 양산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이번에는 기초의원들도 소속 정당을 표기한다.때문에 국회의원들은 온갖 무리를 무릅쓰고라도 '자기 사람'에게 공천을 주려고 하는 것이다. 국회의원들은 내년에 대통령 선거, 또 그 다음해에 총선을 치러야 한다. 훌륭한 일꾼의 조건을 갖췄더라도 나한테 충성을 맹세하지 않는 사람을 어떤 국회의원이 배짱 편하게 공천하겠는가?
투표행태를 예측할 때 이 제도가 갖고 올 문제점은 더욱 심각하다.
지난 선거에서 기초의원 후보들은 추첨을 통해 정해진 순으로 유권자들에게 제시됐다. 유권자들이 아무나 마구 찍는 게 아니라면 후보들의 경력, 공약 등을 한 번은 살펴봐야 했다.
이번엔 다를 것이다. 한나라당 공천은 곧 당선이라는 게 지역의 정치 현실이다. 한나라당 공천을 받느냐 못 받느냐 하는 예선이 5월 31일 치러지는 본선보다 더 중요하다는 데 동의하지 않는 공천신청자는 거의 없다.
즉 이번 지방선거에서는 기초의원들까지 특정 정당 후보가 몰표를 받을 가능성이 아주 높아졌다. 유권자들이 표 줄 기초의원을 찾기 위해 지난 지방선거에서는 적어도 관상이라도 봤다면 이번에는 그마저 필요없게 되는 셈이다.
적어도 대구·경북에서 지방의원 정당공천제는 '회수를 건너가 탱자가 된 귤'임을 한나라당 공천은 증명했다.
전근대적 정치 현실이나 일당 독식의 선거 풍토가 고쳐지지 않는다면 지방의원 정당공천제는 아무리 이론적 당위를 갖추고 있다 해도 시기상조임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이다.
이 제도가 다음 선거에서는 없어지든지 여부나 정치 풍토가 바뀌어 지방의원 공천제 본래의 취지를 살리게 되든지 가부는 두고 볼 일이다. 다만 오는 5월 지방선거에서 특정 정당을 선호하는 성향 그대로 특정 기호에 몰표를 주는 것이 잘못일 수도 있다는 부담은 유권자 몫이 됐다.
이상훈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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