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진짜와 가짜의 틈새에서

입력 2006-03-25 07:35:43

진짜와 가짜의 틈새에서/김광림 지음/다시 펴냄

천재의 삶은 으레 신비롭게 기억되기 마련이다. 게다가 최근 위작시비로 법정다툼까지 가게 된 화가 이중섭은 국민화가로 손꼽히는데다 생전의 불우한 삶으로 더더욱 설화같이 신비롭게 남아있다.

이중섭 타계 50주년을 맞아 이중섭과 깊은 인연이 있는 원로시인 김광림(77)씨가 이중섭의 삶을 회상하며 책 '진짜와 가짜의 틈새에서'를 출간했다.

저자와 이중섭의 인연은 저자의 중학교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 이중섭의 고향인 북한에서 이중섭의 타계까지 이어졌으니, 이중섭의 평생을 곁에서 지켜봤다고 할 수 있다. 그 가운데 저자는 우리나라 미술사가 뒤바뀔 수도 있었던 에피소드도 공개하고 있다.

이중섭이 매일신문 주필을 지낸 구상 시인의 도움으로 대구역 앞 여관에 머무르며 작품활동을 하고 있을 때였다. 이중섭은 자기혐오가 극에 달해서인지 '내 그림은 모두 가짜'라며 주변의 그림을 몽땅 쓸어모아 '불살라버리겠다'고 했다. 그 때 저자가 그 그림들을 모두 빼앗았다가 나중에 돌려준 일이 있다. 미완성작품과 은박지 그림, 소품 등 한 뭉텅이였다고 하니, 오늘날 세상에 남은 은지화와 소품은 그렇게 구제돼 빛을 볼 수 있었다. 지금은 억대를 호가하는 그의 그림도 한때는 불쏘시게로 사용될 뻔한 것이다.

그의 그림에는 몇 가지 소재가 반복적으로 자주 등장한다. 대표적인 것이 남자 아이와 소, 그리고 게 등이다. 그가 이런 소재에 특별한 애정을 보인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그의 삶과 무관하지 않다.

'사나이와 아이들', '맨손으로 물고기 잡는 애' 등 그의 대표작에서 남자 아이는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것은 그가 죽은 아들을 위로하기 위해 그린 것이라고 한다. 부인 마사코 사이에서 팔삭둥이 첫 아들이 태어났지만 디프테리아로 사랑하는 첫 아들을 잃게 된 것. 시인 구상은 이중섭을 위로하러 갔다가 둘이서 고주망태가 되도록 술을 마시고 함께 잠들었는데, 깨보니 중섭은 잠도 안자고 뭔가를 열심히 그리고 있었다고 한다. 죽은 애가 혼자 저승길을 가는 것이 애처로워 숱한 동자상을 그려 그 그림을 죽은 아이 목에 걸어주더라는 것이다.

이중섭의 작품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황소 연작은 학생시절부터 시작됐다. 그가 얼마나 황소를 좋아했던지, 논둑에 매인 소를 하루 종일 관찰하다가 소주인에게 소도둑으로 몰려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그는 소를 통해 자신의 존재성을 끈질기게 천착했는데, 시를 좋아했던 이중섭은 그의 생애에서 단 한편의 습작시 '소의 말'을 남길 정도로 소에 대한 애정은 깊었다.

책에는 저자가 이중섭을 회상하면서 쓴 시도 함께 실려 있어, 이중섭의 삶을 더욱 축약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하지 못한 정을/엽서에다 그리고/은박지에 그려서/고통을 환희로 바꿔 친/한 사내가/거뜬히 시의 수렁 속을/가고 있다/갈증도 모르고/허기도 저버린 채." -김광림, '이중섭 생각2' 중에서.

최세정기자 beaco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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