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0광장-건강은 자연 질서의 한 부분

입력 2006-02-27 11:50:26

건강에는 대박이 없다. 필자에게 왜 굳이 한의사를 지망했는지 묻는 경우가 더러 있다.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가 농사일이 힘들어서 지금의 직업을 선택했다는 것이 확실한 대답이다. 지금은 추억 거리가 되었지만 농사일 중에서도 가장 힘든 일은 모내기를 하는 것이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들판 한가운데서 하루 종일 똑같은 일을 반복해야 하는 그 고통은 어린 시절 가장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부지깽이도 거들어야 하는 바쁜 농사철, 들판으로 노력동원을 나가야 했다. 모를 심는 대신 양 옆에서 못줄을 맞추는 일이 그래도 수월하고 나에게는 제격이었다. 모를 한 줄 가지런히 다 심고 나면 "어이"하는 소리와 함께 줄이 옮겨지고 다시 한 줄을 심게 된다. 이 과정은 단 한 번도 뛰어 넘을 수도, 압축될 수도, 비켜 갈 수도 없다. 해 뜨면 시작되는 괴롭고 지루한 이 과정은 해가 뉘엿뉘엿 뒷산을 넘어 앞이 보이지 않는 시각까지 반복되어야 끝난다.

보리 짚단이나 벼 짚단을 쌓는 일도 마찬가지다. 보리 짚단은 차곡차곡 한 단씩 놓여지고, 양쪽 끝으로는 그 방향을 달리해서 대각선상으로 한 층씩 쌓아서 올라간다. 한 단씩 질서 있게 꽉꽉 짜야지 성글거나 건너뛸 수는 없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이때까지 쌓아놨던 노력은 물거품이 된다. 이런 반복 속에 한철의 농사일이 끝난다. 한 단계도 건너뛸 수 없고 압축할 수 없다.

한국 사람의 일에 대한 집중력과 성취 속도는 세계가 인정하는 바이다. 이런 능력을 바탕으로 대박 신화가 우리 사회에 팽배해 있다. 벤처 기업이나 영화산업, IT 업종들이 그런 꿈들을 현실로 일구어가는 현장이다. 밤샘을 하면서 끼니를 걸러 가면서 몇 날 며칠이고 전력투구한다. 하기야 과정을 압축하고 일의 본질에 다가서서 능률적으로 해결하는 힘은 우리 경제의 원동력이다. 다른 나라들이 몇 세기를 두고 이루어놓은 경제적 성과를 불과 반세기 만에 추월하는 것은 우리 민족의 남다른 저력이다.

이러한 자신감이 진료실에서 건강문제와 연결되기도 한다. 대부분의 환자들이 집중적으로 한꺼번에 치료를 해 달라는 것이다.

우리 몸속의 신진대사는 흐르는 강물처럼 낡은 것에서 새로운 것으로 끊임없이 교체된다. 강물이 흐르면서 찌꺼기가 하구에 쌓이듯 우리 몸에도 내부의 노폐물이 쌓이게 된다. 흘러서 나가야 할 것을 모아두었다가 한꺼번에 압축하여 버릴 것인가 아니면 그때마다 부지런히 제거할 것인가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건강을 위한 운동이나 셀프케어도 마찬가지다. 건강은 자연의 진리와 가깝다. 강도 보다는 빈도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한 해에 한 번씩 에베레스트를 등반하거나 한 달에 한 번 명산을 오르는 것이 아니라 매일 동네 비탈길을 편안한 마음으로 산책하는 편이 훨씬 좋다.

자연의 이법이나 질서에는 압축이나 건너뛰는 일이 없다. 질병이 오는 것은 사고나 감염질환을 제외하면 자신의 생활 습관으로 인해 점차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래서 고혈압이나 당뇨병을 생활 습관 질환이라 부른다. 건강을 되찾는 일도 마찬가지다. 점진적으로 식습관이나 운동, 휴양, 정신 작용이 조화를 이루어 개선해 가야 한다. 의학은 인간의 생명이나 육체를 위기 상황에서 구하기 위한 기술이며 건강 보전은 부수적인 효과에 불과하다.

어떤 의학 전문기자가 하루에 물을 몇 리터씩은 꼭 마셔야 된다는 요지의 건강비법을 소개한 적이 있다. 이후 물 마시는 것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분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서양의학은 절대적인 기준을 중요 원칙으로 삼다 보니 자연적인 원리를 비켜가는 경우도 있다. 물은 일반적으로 그 온도가 4℃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 인체는 어느 곳이든 36.5℃의 체온을 유지해야 하는 항온동물에 속한다. 물을 자기 분수에 맞지 않게 많이 마시면 그만큼 온도를 많이 끌어올려야 한다. 몸이 약해서 마신 물을 데우지 못해 그대로 출렁이면 위장조직을 약화시킨다. 위가 늘어나는 위하수의 증세를 유발하기도 한다. 그래서 남아도는 물이 조직을 약화시키는 것을 한의학에서는 '수독(水毒)'이라 하여 병적인 요소로 파악한다. 비타민도 마찬가지다. 적정한 양은 에너지 대사를 도우는 조효소로 작용하지만 남게 되면 결국 간이나 신장의 대사배설작용을 통해 배출되어야 한다. 그것은 공짜가 아니라 자신의 에너지를 소모해야 하는 과정이다. 만일 남아서 다른 조직에 머물게 되면 오히려 질환을 유발하는 악재가 된다. 모든 것은 자기를 중심으로 조절되는 것이지 절대적 기준이란 없다.

농사일이 자연이듯이 건강도 자연 질서의 한 부분이다. 그 곳에는 대박이나 압축이 없다.

이상곤 대구한방병원 안이비인후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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