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버스 속으로 들어간 개-(4)한국화가 권기철

입력 2006-02-24 11:16:22

개가 사람 닮았나,사람이 개 닮았나

오후 4시를 넘어서면 하루 작업은 휴지부로 들어간다. 서쪽 화실 창문으로 햇살이 각을 세워 앉으면 그때부터는 고스란히 권태를 즐기는 것, 턴테이블 위에 블랙 판을 얹고 늘어지는 잡음의 밀도까지 조절하고, 그림과 무관치 않은 공상을 하거나, 책을 뒤적이며 세상을 읽는 게 그것이다.

또한 그것은 노란 오후에만 오는 달콤한 휴식, 그림에서 일탈하는 익숙한 습관이기도 하다. 한 모금의 커피를 빼물고 의자 깊숙이 몸을 의탁해 비주얼 시대에 비주얼이 커진 책 한 권을 잡고 '세상을 향해 짖는 즐거운 상상'을 한다. 표지를 보면서 "음, 이것 봐라!" 그림으로 옮기고 싶은 충동, 황급히 작고 귀여운 '개'가 등장하는 영화 '벤지'의 사운드 트랙(I Feel Love)으로 음반을 바꾸어 건다.

형은 세 살에 앞을 못보게 됐다. 생리학적 기제에 따라 행동하는 순간부터 세상의 '보이는' 모든 풍경은 종결되고 그로부터 '봤다'는 기억은 복구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집에서 키웠던 '바둑이'는 형의 멈춘 눈을 대신해 준 보호자, 초등학교를 마치고 오는 어느 날 신작로 중앙에서 알 수 없는 수캐와 떡하니 '흘레붙는' 바둑이를 친구들과 목도한 후, 나에게 개는 도대체 끝장낼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 있다.

개띠, 병술년도 벌써 한 달 반이 잘렸다. 개는 인간의 보조자를 넘어 보호자 역할까지 한다. 인간이 개에게 들이는 정성은 상상을 초월한다. 개는 인간과 더불어 같은 공간에서 밥 먹고 같은 곳에서 잠자는, 확고한 가족 구성원으로까지 진화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한국 사람들에게 개는 입에 발린 상투적인 욕지거리이기도 하다. 불온하기 짝이 없는 '개새끼', '개자식', '개뼈다귀 같은' 등등의 수식은 말할 수 없이 많다. 이처럼 개에 관한 인간들의 잣대는 다분히 이중적이다.

"개들은 짖거나, 사랑을 나누거나, 졸거나, 배회하거나 했다. 하지만 어떤 개도 거짓말을 하거나 편을 지어 패싸움을 하지는 않았다." 이 글은 전시기획 출판물, 제목과 더불어 활자 사이사이에 쥐똥처럼 작게 들러붙은 표지 글이다. 600쪽이 넘는 두텁한 하얀 책 표지에는 명조체를 변형시킨 타이포그래피(세상을 향해 짖는 즐거운 상상)가 위에서 아래로 무작위로 박혀 있고, 오른쪽 아래 암수인 듯한 두 마리의 개가 숨 가쁘게 '흘레붙는' 먹그림이 있다. 그리고 또 하나, DOG-GOD라고 가로로 정렬된 영문도 눈에 띈다. 책표지는 친절히 내용물에 대한 일단의 정보를 배려해 준다.

두 장의 간지를 넘기면 "살아 있는 모든 것에는 배울 것이 있다"라고 적혀 있으며 뒤쪽으로 파격적인 편집이 보인다. 단색 드로잉과 낱말, 또는 짤막한 텍스트들은 작금을 날카롭게 풍자한다. 인간과 개의 관계항이거나 일종의 보고서다. 개에 관한 문화적 담론을 이끌어 내기에 충분한 것 같아 흥미롭다.

형과 어린 날의 개는 물론, 책의 표제는 작업 모티브로 작용했다. 형상은 간결한 몇 가닥의 선, '흘레붙는' 개 두 마리의 모습이다. 유년에 내가 살갑게 사랑했던 개다. 색채대비는 이중적 태도, 노란색 배경은 오후, 또는 개의 침대로 비약해도 무관하다. (설명은 사족 다는 일?)

공공장소나 사람들의 시선은 개의치 않는 게 그들의 품행이다. 개의 흘레가 영 마땅치 않고 당혹스러운 사람들은 개들에게 노랗고 푹신한 침대를 내밀어 경배할 일이다.

사진: 오후-흘레붙다(한지에 혼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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