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수(雨水)를 지나니 벌써 봄인가 싶을 만큼 날씨가 푹해졌다. 어저께는 골목길에서 엷은 밤색에 까만 점 찍힌 나비가 담장에 사뿐 내려앉는 모습까지 보았다. 선운사 동백꽃이 궁금해진 한 친구는 현지에 전화했다가 "3월 말이나 돼야 피어요"라는 답을 들었다며 웃는다.
남쪽 소도시에 사는 친구가 난분(蘭盆)을 보내왔다. 봄을 실어보낸 듯해 마음이 환해진다. 잎 없이 꽃만 피우는 화경(花莖) 두 대가 잎새들 사이로 쑥 솟아 있다. 산수유나 생강나무꽃만 일찍 피는 줄 알았더니 화분의 난도 봄의 전령사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된다.
난은 여러모로 독특한 존재다. 화려하거나 유달리 예쁜 점도 없건만 예로부터 동양에선 품위있는 아름다움의 표상으로 여겨졌다. 그윽한 향기와 고상한 운치 때문이다. 때문에 한가로운 멋, 정신적 여유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난을 애지중지해 왔다. 청(淸)나라 사람 심복(沈復)의 자전적 글 '부생육기(浮生六記)'를 보면 심복 부부가 지인에게서 제법 계보에 오를 만한 춘란 한 분(盆)을 선사받아 정성을 다해 키웠으나 이태가 못 돼 죽었다. 누가 난초 나눠달라는 걸 거절했더니 몰래 뜨거운 물을 부어 죽게 만든 걸 알고 애석해 하는 내용이 나온다. 중국 명(明)나라 진계유(陳繼儒)가 '매란국죽사보(梅蘭菊竹四譜)'에서 매'난'국'죽을 사군자(四君子)라 칭한 이후 숱한 시인묵객들이 세상 오탁에 물들지 않는 군자, 고고한 선비의 상징으로 난을 칭송해 왔다. 공자도 군자나 선비의 고아한 풍모와 인격을 말할 때 '난향유곡(蘭香幽谷)'으로 표현했다.
난은 참 까다로운 존재이기도 하다. 까딱하면 썩혀 죽이고, 아니면 말려 죽이고, 몇 해를 실패해야 겨우 문리가 트일까 말까다. 몇 년을 기다려도 꽃을 볼동말동 할 때도 많다. 사람을 감질나게 만들고 오래도록 기다리게도 한다. 그래서 요즘 같은 인스턴트 시대에 인내와 기다림의 미덕을 배우게 만든다.
무엇보다 난의 미덕은 향내에 있지 않을까. 짙은 향기는 사람의 성정을 흥분시키고 쉬 질리게 하지만 은은한 난향은 날뛰던 마음도 순하게 가라앉힌다. 키플링은 "냄새는 시각이나 소리보다 더 확실하게 심금을 울린다"고 했다. 더디 자라고 더디 꽃 피우는 난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뭘까, 친구가 보내온 난분을 보며 잠시 생각에 빠져본다.
논설위원 sirius@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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