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킹, 원할 때 아무 때나 즐기세요"

입력 2006-02-22 09:43:24

장면 1. 2010년 3월 어느 날. 경주 모 골프장 나영업 과장은 아침부터 회의자료 준비에 머리가 아프다. 요 몇년 새 경주와 인근 포항, 영천지역에 잇따라 골프장들이 들어서면서 영업이 갈수록 부진, 연일 비상대책회의가 열리고 있기 때문이다. 평소 관리하는 대기업 임원들과 가진 전날 회식의 숙취도 아직 깨지않았지만 회의에서는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요금 인하에 대한 검토는 끝났나", "회원 특별 이벤트는 마련했나", "다른 골프장과 차별화전략은 도대체 무엇이냐". 쏟아지는 비난과 추궁. '영업 안되는게 제 잘못입니까.'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른 말을 억지로 삭이고 나 과장은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보고하겠습니다"라며 회의장을 빠져나왔다. 순간 그의 머리 속에 흘러간 유행가 하나가 떠올랐다. '아! 옛날이여'

장면 2. 2010년 9월 어느 날. 모처럼 화창한 날씨에 라운딩 약속을 앞둔 주말골퍼 이백타 씨는 들떠 있었다. '날씨 좋고 컨디션 좋고. 친구들아 기다려라. 오늘은 내가 최고다'

직장에서 만년 과장 신세인 그의 요즘 유일한 낙은 주말 라운딩. 토·일요일은 만사를 제쳐두고 직장동료나 친구들과 골프를 친다. 이씨는 클럽을 챙기면서 세상 참 많이 변했다고 생각했다. 7년 전 처음 입문할 때만 해도 라운딩 한 번에 25만 원이나 들어 여간 부담스럽지않았지만 지금은 그 절반값에 전화 한 통이면 되기때문이다. '정말 옛날 일이 되어버렸네. 온갖 줄을 다 동원해도 부킹이 어려웠는데 이젠 월요일마다 골프장에서 전화오잖아.' 흐뭇한 미소를 띄우며 이씨는 차 시동을 걸었다.

■부킹 대란 사라지나

경북 도내 골프장이 크게 늘어나는 4년 뒤에는 이런 현실이 가능할까. '부킹은 하늘의 별따기'란 말은 사라지고 '고객이 만족할 때까지'란 말이 나올까. 이렇게까지 '환상적'이지는 않아도 골프장 풍속도가 바뀔 것만큼은 분명하다. 골프시장이 점차 공급자 중심에서 수요자 중심으로 전환되고 있기 때문이다.

골프 부킹이 어려운 이유는 당연히 골프장 숫자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2005년 1월 현재 국내 골프장은 총 194개(회원제, 대중골프장 포함). 골프장 1곳당 인구 수는 26만9천명으로 미국 1만7000명, 영국 2만9000명, 일본 5만2000명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셈이다.

대구·경북지역 골프장도 1990년대 들어 골프 붐이 일면서 어느 골프장이나 주말은 물론 주중까지도 부킹난에 시달리고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골프장이 급증하면서 홀당 이용객 수가 감소하는 등 매출이 조금씩 줄어드는 추세다. 여기에 가격 경쟁력이 있는 동남아 등지로 떠나는 골퍼들이 크게 늘어나면서 지역 골프장 업계는 불황을 돌파하기 위한 묘책 마련에 비상이 걸렸다.

골퍼 입장에서 보면 부킹과 관련한 각종 지표는 긍정적이다. 한국레저산업연구소에 따르면 골프장 공급이 확대되면서 지난해 회원제 골프장들의 홀당 이용객 수는 7.0% 감소, 2004년 이후 감소세가 지속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홀별로는 18홀 골프장(74곳)의 평균 이용객수는 전년보다 6.1%, 27홀 골프장(40곳)은 7.8%, 36홀 골프장(17곳)은 7.9% 각각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지역별로는 제주가 15.9%나 급감, 감소폭이 가장 큰 가운데 영남권도 6.0% 감소했지만 전국에서 부킹난이 가장 심한 것으로 나타났다.

■무한경쟁 시대 본격화

고객 확보를 위한 골프장들의 무한경쟁은 일부 지역에서는 벌써 본격화되고 있다. 골프업계에 따르면 '사계절 골프'로 각광을 받았던 제주지역 골프장들은 지난 2002년 9개에서 지난해 16곳으로 늘어나면서 골프장마다 고객유치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제주도에는 올 하반기 2곳이 또 들어서고 다른 2곳도 내년까지 문을 열 예정이어서 3년 사이 모두 11곳이 늘어나게 된다.

대구·경북지역에서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 빚어질 것으로 관련 업계는 내다보고 있다. 현재 6곳이 있는 경주시의 경우 조성중인 곳이 4곳인데다 유치를 추진중인 곳도 4곳에 이르러 2010년이면 14곳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경주 보문CC(대중제 18홀) 손원준 과장은 "인근 신규 골프장들이 시범라운딩에 들어가면서 최근 영업실적이 작년 대비 94% 수준으로 낮아졌다"라며 "겨울철 비수기에는 요금 인하를 하자는 내부 의견도 있지만 당분간 추이를 더 지켜보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고 전했다.

손 과장은 또 "요즘에도 오전 7시20분 이전 시간대에는 비는 경우가 많이 있다"라며 "경주에 현재 운영중인 6개 골프장 외에 4곳이 더 늘어나면 부킹난은 어느 정도 해소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차별화되는 골프장

골프장이 크게 증가하면서 비단 부킹만 쉬워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면 살아남기 위한 차별화전략이 두드러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올해 4월쯤 시범라운딩을 거쳐 개장할 예정인 태영 디아너스C.C(27홀 회원제) 레저사업부 이동률 차장은 "지금까지는 요금, 서비스 수준 등이 비슷비슷했지만 앞으로는 골프장 간의 등급화 현상이 두드러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제부터는 골프장도 고급-중간-일반 골프장으로 구분돼 요금뿐만 아니라 부킹 등 회원들에 대한 혜택의 차별화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는 것.

이 차장은 "아직까지는 요금 인하요인이 있을 정도는 아니지만 지난해부터 주중 부킹은 예전에 비해 크게 쉬워졌다"며 "골프장이 2천개가 넘는 일본의 경우 벌써 퇴출되는 골프장이 나타나고 있는 만큼 우리나라에서도 머지않아 주중에는 가격 덤핑 현상이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영천 오펠골프클럽 이정익 사장은 "현재 조성중인 골프장이 완공되는 2008년쯤에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골프장에도 일어날 것"이라며 "골프장 운영도 철저한 회원제 위주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골프인구가 골프클럽의 신규 조성에 맞춰 더 늘어나지않는다면 서비스와 경비 인하에 따른 출혈경쟁은 불가피할 것"이라며 "골프장을 만들면 곧바로 엄청난 수익을 보장받는다는 이야기는 옛말이 될 전망"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다른 견해를 내놓고 있기도 하다. 공급이 꾸준이 늘고 있는 상황이라 전반적인 부킹난은 해소될 수 있겠지만 인기 골프장들은 더 부킹하기가 힘들어질 수도 있다는 것.

"골프, 원할 때 아무 때나 즐기십시오." 지긋지긋한 예약전쟁을 치러야 하는 골퍼들에게 이런 말은 가장 듣고 싶은 말이 아닐까.

이상헌기자 davai@msnet.co.kr

영천·이채수기자cslee@msnet.co.kr

경주·김진만기자 fact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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