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신뢰'는 경제적 자원이다

입력 2006-02-16 11:49:29

한국이 정보통신 강국을 지향하면서 해외와의 소통에 신경 쓴 탓인지 우리의 언어 생활에서 외국어'외래어 사용이 크게 늘었다. 이해해야지 어떡하겠는가. '원 소스 멀티 유스(one-source multi-use)'도 그런 경우로 최근 들어 부쩍 많이 쓰이고 있는 용어다. '창구 효과'라고도 한다. 돌 하나로 여러 마리의 새를 잡는다는 뜻이니 '일석다조(一石多鳥)'라고 해도 되겠다.

예컨대, 영화 한편을 생각해보자. 영화관에서 상영이 끝난 뒤에도 영화는 지상파방송, 케이블방송, 위성방송, 인터넷, 비디오, DVD, 해외수출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활용되면서 계속 부가가치를 높일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게임'캐릭터산업을 키울 수 있고 관광 유인 효과도 발휘할 수 있으며 국위선양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원 소스 멀티 유스' 전략은 문화산업 내부의 투기성을 높이고 양극화를 초래할 수 있다. 속된 말로 '대박'이 한번 터지면 수십 배의 이익을 창출할 수 있기 때문에 모험을 선호하게 되고 '대박 상품'은 시장을 '싹쓸이'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특히 자본이 영세할 뿐만 아니라 투자 유치도 어려운 지방은 늘 해외와 중앙에서 쳐들어오는 '원 소스 멀티 유스' 전략의 시장으로만 전락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지방은 '원 소스 멀티 유스'의 불모지인가? 그렇진 않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해외'중앙과 비교해볼 때 지방의 상대적 강점은 무엇인가? 그건 바로 공동체 의식이다. 지방에 공동체 의식은 살아있는가? 각 지역에 따라 사정이 다르긴 하겠지만, 잠재된 공동체 의식은 강하게 남아있을망정 발휘되지 않거나 매우 왜곡된 형식으로 발휘되는 경우가 많다.

먹고살기가 힘들다 보면 싸움도 많이 일어나는 법. 많은 지역이 '고소'고발의 천국'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불신과 갈등의 몸살을 앓고 있다. 지역 전체를 위해 무슨 좋은 일을 하고자 해도 여론을 수렴하는 일조차 하기 어려운 지역이 많고, 일을 추진함에 있어 사분오열된 양상을 드러내 보이기도 한다.

그런 현실에 비추어 보자면, 지방에서 가장 강력한 경제적 자원은 '신뢰'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민관(民官)을 막론하고 지역민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는 '중심'만 있다면, 그 '중심'을 근거로 공공 이익을 추구하는 좋은 일들을 많이 할 수 있음에도 바로 그런 '중심'이 없는 것이다.

'신뢰'라는 '원 소스'만 있다면 다양한 '멀티 유스'를 기대할 수 있다. 지역 내 갈등을 해소하는 데에 기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공익적 사업을 위해 큰 돈을 모으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신뢰 집단'을 만들자. 시민단체, 언론사, 지식인, 관(官) 등 그 누구라도 좋다. 모두가 함께 해도 좋다.

당장 떠오르는 건 그 집단의 헤게모니를 둘러싼 감투싸움일 것이다. 그런 일을 한두 번 겪어본 게 아니라는 반론도 나올 법하다. 바로 여기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처음부터 거창하게 시작하려는 생각부터 버리고 천천히 차근차근 실적을 쌓아가면서 해보자. 모든 걸 투명하게 민주적으로 시작해보자. 이념과 정치적 성향은 끼어들 수 없게끔 하자. 그것들이 나쁜 건 아니지만, 갈등의 요인이 되는 만큼 그것들과 무관한 일들만 추진하는 것으로 출발해보자.

어림도 없는 천진난만한 생각이라는 반론이 있으리라는 걸 안다. 그러나 주목할 점은 자기 욕심 부리지 않고 그런 일을 해낼 수 있는 사람들은 원래 나서길 몹시 싫어한다는 사실이다. 이제 그런 사람들이 나서야 한다. 적어도 투명성 감시자이자 갈등 조정자 역할은 해줘야 한다. 화려한 선언보다는 묵묵히 주변을 돌보는 작은 일에서부터 시작해보자.

신뢰는 더 이상 도덕의 영역만은 아니다. 이제 그건 경제가 되었다. 신뢰 없이 그 어떤 경제적 사업도 성공을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간 신뢰가 너무 고갈되었기 때문이다. 신뢰를 생명으로 삼는 상인정신이 필요하다. 신뢰라는 '원 소스'로 껍데기뿐인 지방자치 한번 제대로 해보고 바람직한 공동체를 만드는 대박을 터뜨려보자. 그간 고고하게 살았던 분들이 이젠 나서야 한다.

강준만(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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