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太洙 칼럼-'말 무덤(言塚)'이 말하는 지혜

입력 2006-02-14 11:38:31

빈말 잔치'의식 마비 경계로 / 亂麻 같은 정치문화 바꿔야

예천의 '말 무덤(言塚)'을 새삼 떠올린다. 지보면 대죽리 한대마을의 이 무덤은 누가 언제 만들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400~500여 년 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그러나 이 무덤이 말하는 '경계(警戒)' 만은 너무나 분명하다.

옛날 이 마을엔 여러 성씨들이 살았으며, 그들 간에 말로 인한 싸움이 잦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한 과객(過客)이 인근 야산 형세를 보면서 '개가 짖어대는 형상이어서 마을이 시끄럽다'고 일러 줬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개에 재갈 물린 모양의 '재갈바위'를 마을 어귀에 세웠다. 개의 송곳니 자리에 해당하는 마을 앞 논과 앞니 자리쯤 되는 곳에 2, 3개씩이나 그런 바위를 설치하고, 개의 아래턱에 해당하는 마을 왼쪽 '주둥개산'엔 사발을 묻어 무덤을 만들었다.

이 '험한 말들 장사지내기' 이후, 과객의 말대로 이 마을에는 말싸움이 가라앉고, 화목을 찾았다고 한다. 지금 이 바위들은 경지정리 등으로 마을회관 앞으로 자리가 바뀌기도 했지만, 50여 년 전에만도 이 무덤 앞에서 제사가 올려졌단다. 공동체의 화평을 위한 선조들의 현명한 지혜의 소산이 아닐 수 없다.

오늘의 우리 사회는 말들 때문에 늘 어지럽고 시끄럽다. 선거철이 다가오면서 도처에 '빈말 같은 말잔치'들이 벌어지고, 탈도 많고 문제도 많아지는 형국이다. 진실을 진실이 아닌 것으로, 진실이 아닌 걸 진실처럼 말하는 경우가 적잖은 탓이다. 자신의 영달만 좇는 '자기중심적 가치관'이 날개를 달고, 심한 경우 모략과 중상이 고개를 들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5'31 지방선거'를 앞두고 벌써부터 '빈말 잔치'가 요란하며 '돈 공천'설도 나돈다. 공무원들까지 특정인 지지를 유도하는 식사 대접으로 물의를 빚는 등 과열'혼탁 양상도 도진다고 한다. 포항에선 특정 후보 예정자 지지를 유도하며 밥값을 낸 공무원 3명이 적발됐다. 경주에선 공무원 간부회의 자리에서 시장 경선 후보 지지도 변화를 담은 여론조사 자료가 유포돼 논란을 빚었다. 김천에서도 유권자들에게 선물 세트를 돌리거나 식사 대접 요구 등으로 고발되는가 하면, 과태료를 무는 일도 있었다는 소문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공천 헌금'이니 '공천 장사'니 하는 썩은 용어들이 무색해지는 건 물론 '빈말 경연'이나 '감투만 겨냥한 이전투구'가 더 극성을 부리지 않을는지도 걱정스러워진다. 더구나 5'31 선거의 과열'혼탁 양상은 지방의원 유급화와 기초의원 정당 공천제, 3연임 제한 등으로 예고된 거나 다름없다. 과거와 달리 지방의회에 진출만 하면 적잖은 돈도 받게 돼 '너도 나도 나서기' 바람이 이는 건 당연한 일일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공천만 받으면 당선 가능성이 높아지는 곳에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온갖 편법'불법들이 동원될 소지마저 적지 않다.

우리는 선거를 치른 뒤 후회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변을 돌아보면, 자신만을 위한 무서운 경쟁들 때문에 정작 해야 할 일들이 묻혀 버리기 일쑤였다. 선거 뒤엔 거창했던 공약(公約)들이 공허한 빈말(空約)들이 되고, '거품 지향성'에 따른 허탈감과 실망, 돌이킬 수 없는 후회를 한 적이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지금 우리가 겪는 어려움들도 빈말들의 싸움과 그 허구에 속은 탓이 얼마나 많았는지는 새삼 말할 나위조차 없다.

이제부터라도 더 아프게 후회하지 않으려면 '의식을 마비시키는 선거전'에 놀아나선 안 된다. 정치권이나 후보자들의 행태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이를 차단하려는 의지가 확고하다면 사정은 나아질 수도 있다. 합리적인 판단을 가로막고 비이성적인 선택을 유도하려는 행태들을 이젠 단호하게 거부해야 한다.

'개의 해'에 하나씩 '마음속 말 무덤'을 만들어 제사지내는 심정으로 난마(亂麻)처럼 얽혀 소란스러운 정치문화를 바꾸기 위한 '현명한 판단'이 요구된다. 발레리는 '선거야말로 우리 사회의 최대의 암'이라고 했던가. 그 암을 어떻게 극복하느냐는 분명 우리 몫임을 잊지 말 일이다.

논설주간 tspoet@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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