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2월. 세계는 최강대국 미국에서 벌어지는 한 편의 코미디를 흥미롭게 지켜봤다. 1억3천만 명의 미국인 가운데 537명으로부터 표를 더 얻었다는 선거 당국의 발표와 함께 조지 부시가 대통령에 오르는 모습이다. 이런 미미한 표 차이조차 조작됐을 가능성이 대단히 컸지만, 부시의 손을 들어준 한 연방대법원 판사에 의해 법률적 결론은 내려지고 말았다. 세계인들은 각 주에 배정된 선거인단 가운데 한 명이라도 더 지지를 얻은 후보에게 그 주의 표를 전부 몰아주는 미국의 어수룩한 선거 제도에 웃었고, 마지막 선거구인 플로리다주에서 이뤄진 투표의 오류와 검표, 재검표 소동에 또 한번 웃었다.
세계가 미국을 조롱거리로 여기는 순간, 고어 후보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해 논란에 종지부를 찍었다. 선거 결과나 대법원의 판결을 인정한 것이 아니라 '국민의 분열을 막고 민주주의의 힘을 보여주기 위해 결과를 겸허하게 수용'한다는 것이었다. 선거에 지고도 결과에 이긴 부시는 즉시 대통령직에 오를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혹시라도 선거의 문제점을 인정하면서 재선거를 하자고 제안할지 모른다는 일부 사람들의 순진한 기대는 애초에 현실성이 없는 것이었다.
5년여가 지난 지금, 고어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미국 대통령 부시를 모르는 사람은 그보다 훨씬 적다. 과정보다 결과를 더 중시하고 패배보다 승리를 더 귀하게 여기는 생각은 언제나 인간의 역사와 동행해 왔기 때문이다. 역사는 대개 승자의 기록이었다.
경쟁이 개인의 사고를 지배하고, 삶을 결정하고, 미래를 좌우하는 오늘날에는 이런 생각들이 더더욱 당연한 것이 됐다. 그 결과, 승리를 기뻐하는 사람의 수는 과거나 비슷한 데도 패배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람들의 수는 수십 배로 늘어났다. 패배자의 대열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위기감, 승리에 대한 욕망은 그보다 수십 배로 커졌다.
얼마 전 대학입학 경쟁률을 낮추기 위해 원서 접수 대행 사이트를 무차별 공격한 사실이 드러나 범죄자의 멍에를 쓰게 된 수험생들은 어쩌면 이런 현실의 피해자일지 모른다. 결과에 집착해 과정의 합리성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판단력을 상실하게 만든 건 우리 사회일지 모른다. 수십만 명의 다른 수험생들은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는데 너희 수십 명만 그런 짓을 했느냐고 몰아붙이는 건 일종의 폭력일지 모른다.
그들 수험생을 위해 변명하자는 게 아니다. 엄청난 숫자의 수험생이 휴대전화를 이용해 수능시험에서 부정을 저질렀다는 사실에 충격받은 게 불과 1년 전의 일인데, 또다시 같은 충격에 떨어야 하는 현실이 안타까운 것이다. 지난 1년 동안 우리가 관심을 가져온 것이라곤 고작 부정행위자에 대한 처벌을 얼마나 강화하느냐는 부질없는 일이었다는 사실이 씁쓸한 것이다.
독일의 언론인 볼프 슈나이더는 그의 책 '위대한 패배자'에서 "승리자로 가득 찬 세상보다 나쁜 것은 없다. 그나마 삶을 참을 만하게 만드는 것은 패배자들이다"라고 지적한다. 학교에서는 이것부터 먼저 가르칠 일이다.
김재경기자
댓글 많은 뉴스
문재인 "정치탄압"…뇌물죄 수사검사 공수처에 고발
[전문] 한덕수, 대선 출마 "임기 3년으로 단축…개헌 완료 후 퇴임"
이준석, 전장연 성당 시위에 "사회적 약자 프레임 악용한 집단 이기주의"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
野, '피고인 대통령 당선 시 재판 중지' 법 개정 추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