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부-'팩션' 시대

입력 2006-02-11 10:47:39

요즘 우리나라에서 '팩션(faction)'이라는 조어가 강한 조명을 받고 있는 것 같다. 사실(역사)을 뜻하는 '팩트(fact)'와 허구라는 의미를 지닌 '픽션(fiction)'을 조합한 '팩션'은 상상력의 유희를 통한 '재미'를 강화해 주기 때문이다. 역사적 사실이나 실존 인물의 이야기는 고루하게 느껴지기 십상이다. 하지만 거기에 상상력이 보태져 새로운 현실로 빚어졌을 때 역사에 비어 있는 여백들이 살아나 색다른 흥미를 안겨 주기 때문이다.

쪊사극(史劇)은 고루한 장르로 여겨져 온 게 사실이다. 이 서사(敍事) 장르는 소설'영화'드라마를 막론하고 실록 위주의 왕조사나 궁중 암투, 위인이나 영웅의 일대기를 재현하는 데 그치게 마련이었던 탓이다. 그러나 근년 들어 '스캔들' '황산벌' '혈의 누' '무영검' 등의 사극영화나 '대장금' '궁' 등의 드라마가 사실에 상상력의 유희를 가미해 인기를 끌었다. 소설 '칼의 노래'(김훈) '황진이'(전경린) 등도 마찬가지다.

쪊영화 '왕의 남자'가 개봉 45일 만인 오늘 1천만 관객을 돌파한 모양이다. 뿐 아니라 날마다 7만 명 이상이 관람하는 지금 추세가 지속된다면, 한국 영화 사상 최대 흥행 기록을 세울 것으로 보인다. 관객이 '실미도'(1천108만 명)' '태극기 휘날리며'(1천174만 명)를 훨씬 능가할 가능성을 보여 주지 않는가. 더구나 제작비가 '실미도'의 82억 원, '태극기 휘날리며'의 147억 원보다 엄청 적은 44억 원이 들었다고 한다.

쪊그렇다면, '팩션'으로서 이 같은 견인력을 가진 까닭은 '왜'일까. 전문가들은 사실에 보태진 허구, 특히 상상력의 유희가 '이야기의 힘'을 증폭시켰기 때문이라고 풀이한다. 말하자면, 사실과 허구의 절묘한 결합으로 연산군과 저잣거리의 광대들이 펼쳐 내는 이야기를 다층적 구조로 얽어 관객을 사로잡았다는 풀이인 셈이다.

▲요즘 사람들은 다분히 '자기중심적'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왕과 위인들만의 시공간에는 쉽게 빨려들지 않는다. 반면 '왕의 남자'가 말해 주듯이, 생활이나 풍속 등 주변부의 한 부분을 통해 역사 전체를 조망하는 방식의 미시사 도입에 더욱 이끌린다는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렇게 가다가는 사실과 역사를 외면하면서 이의 왜곡으로까지 나아가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한다면 지나친 노파심과 기우이기만 할까.

이태수 논설주간 tspoet@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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