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함께

입력 2006-01-25 10:32:01

구두를 바꾼 지

몇 개월 되지 않았는데

제법 어슷하게

뒤꿈치가 닳아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내 걸음걸이가 어슷하기 때문일 거라 생각했는데

곰곰이 되짚어 보니

내 사유의 무게 중심도

오랫동안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던 것이다

구두 한 켤레를

나란히 벗어 놓았는데

왼쪽이 오른쪽보다 많이 닳아 있는 것이다

내 생각이

왼쪽으로 어슷하게 칼질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고

내 옹졸한 언행들도

닳은 도마 위에서 버릇처럼 어슷하게 쓰러졌던 것이다

어슷하게 기울어진 내 삶의 무게 중심이

자꾸만 고단한 생각들을 어슷하게 썰어 놓았는데

오늘도 커다란 삶의 낙인 하나가

낡은 구두 뒤꿈치에 어슷하게 밟혀 눕는 것이다

김환식 '낙인(烙印)'

우리의 현실인식이 지나치게 기계적이다. 이러한 현실 인식 태도를 이성적·합리적 판단이라 생각해 왔다. 심지어 지적 사유라 생각해 왔다. 육안(肉眼)으로 바라보는 현실인식이다. 육안에 믿음을 가지는 우리는 어느덧 심안(心眼)을 잃었다. 육안으로는 현상(現像) 그 너머에 있는 진실은 바라보지 못한다. 결국 초월을 꿈꾸지 못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한 켤레의 구두가 '왼쪽이 오른쪽보다 많이 닳아 있는 것'은 순전히 체중이 왼쪽으로 기울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이것은 육안의 세계다. 그러나 심안으로 바라보면 '내 생각이/ 왼쪽으로 어슷하게 칼질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육안으로만 '삶의 낙인'을 찍으며 그것을 진실이라 믿는다.

구석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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