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단순하게 살지 못하는 이유

입력 2005-12-09 09:04:42

몇 년 전 '단순하게 살아라'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적이 있다. 평소 물건 버리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던 나에게 가장 충격적으로 다가온 것은 "당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들의 대부분은 쓰레기다"라는 문구였다. 물론 이사를 하거나 사무실을 옮길 때, 연말연시 정기적으로 주변을 정리할 때마다 "이번엔 어떻게든 눈 딱 감고 버려야지" 작정을 하지만 내겐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이다. 나는 물건을 쉽게 버리지 못한다. 몇 번이나 정리한답시고 내어놓고는 하나씩 챙기다 보면, 어느 새 다시 서랍 속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그러다 보니 항상 서랍이며, 캐비닛마다 물건들로 넘쳐난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버리지 못할 만큼 소중한 사연이 있는 것들인데….

책상 서랍을 열다가 잘 열리지 않아 보았더니 내용물이 너무 많아 서랍문턱에 끼어 있었다. 일부 서랍 뒤로 떨어진 편지들을 주워 보니 이제는 고인이 되신 두 분의 편지가 눈에 들어온다.

"내가 대구에 온 지 어언 삼사 삭이 되었구나. 막상 가려하니 정말 섭섭하다. 선아야 이것 약소하나 시험치는 날 잡비 써다고. 대망에 금메달 따기 기도한다. 이모할머니가"

"고등학교 졸업은 공부를 다 마친 것이 아니고 한 과정을 통과하는 것이기에 이것을 pass out이라 한다. 대학졸업만이 graduate라고 그런다. 이제부터 4년간을 유익하게 나날이 중요하게 보내라. 시골 한 모퉁이에서 외조부 씀"

하나는 20년 전 이모할머니의 편지로 대입 시험치는 날 용돈과 함께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슬하에 자손이 없어 나를 친손녀처럼 예뻐하셨던 분이다. 젊은 시절 앓은 열병으로 몸 한쪽이 마비되어 거동이 불편하신데도 왼손으로 정성들여 쓰신 그 편지를 볼 때마다 마음 속 깊이 따뜻함을 느낀다. 또 하나는 고등학교 졸업을 축하하며 외할아버지가 보내 주신 편지다. 봉투 속에 같이 들어 있던 돈으로는 처음으로 멋쟁이 뾰족구두를 샀던 기억이 난다. 곱게 신는다고는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앞굽이 자꾸 헤어져 더 이상 신지 않고 신발장 속에 모셔두고 있다.

기능이 다했다고 쉽게 내버리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참 단순하게 살 수 있어서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물건들이 내겐 쓰레기일 수가 없다. 세월이 쌓이는 만큼 추억도 쌓이는 법. 책상 서랍 속 오래된 물건들이 내게 말을 건다. 그 수많은 사연들을 들어주느라 오늘도 밤이 깊어간다.

정일선(경북여성정책개발원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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