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꿈 나의 삶-사업확장과 기업 공개

입력 2005-11-28 11:36:51

1984년 12월 15일, 단일상가로는 당시 지방 최대규모였던 동아쇼핑센터가 덕산동에서 개점되었다. 그곳은 이전부터 재개발구역으로 지정되었으나 경기침체로 개발이 부진하여 오랫동안 불량지구로 방치된 지역이었다. 도심의 중심상권에서 다소 떨어진 지역이었으며, 또한 이전에 남일동이나 향촌동에 재개발사업으로 들어섰던 다른 회사 백화점이 실패했기 때문에 개발업체가 선뜻 나서지 않았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대동'대서로와 중앙로가 교차하는 반월당 인접지역으로 대구상권이 이동할 것으로 예상하여 나는 과감한 투자를 결심하였다. 재개발추진위원회와 협의가 쉽지 않아 협상과 결렬을 반복하다가, 81년 12월부터 본격적으로 사업이 추진되었다. 이 지역에는 보존가치가 있는 전통가옥이 많았고, 또 오랫동안 서민들과 함께한 재래시장이 있었는데, 재개발로 이러한 것들이 사라지는 안타까움을 가진 이들도 많았다. 이를 대신할 길은 대구의 상징적인 건축물을 건설하되, 백화점으로서만이 아니라 애환을 달랠 수 있는 도심 속의 문화활동 공간으로서의 역할도 할 수 있어야 했다. 첨단공법을 사용하여 지하 3층, 지상 12층의 매머드급 건물로 그렇게 완공된 동아쇼핑센터는 대구상권을 남진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당시 건축을 전공하는 사람들과 재개발업무를 보던 공무원들이 도시재개발 사업과 재래시장 근대화의 성공사례로서 정기적으로 찾아오던 교육코스가 되기도 하였다. 동아쇼핑센터 개점성공의 여세를 몰아 지방유통업체 최초로 서울 을지로에 패션전문 쁘렝땅백화점을 개점해 서울 상권에 일대 변화를 가져오기도 했다.

회사가 비약적인 성장을 하던 1988년 8월 25일, 자본금 120억 원으로 기업을 공개하였다. 상장회사가 되면 기업이 보다 투명해지며, 대형화'국제화로 자본력이 튼튼해지고, 많은 주주 특히 대구'경북지역민들과 이익을 공유하게 되어 기업의 이익이 사회로 환원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 회사나 상장회사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증권관리위원회의 까다로운 선정기준에 모두 부합하는 회사는 당시 대구업체 중 화성산업이 유일했다. 기업을 상장할 즈음에 정부의 주택 200만 호 건설사업이 시행되어 전국에서 아파트 건설붐이 일었다. 당시 아파트 청약경쟁률이 대단해 주택사업이 활황세를 탔는데, 이전에 지었던 것과 달리 화성이 본격적으로 주택사업을 정비해서 건립한 첫 작품이 지산동에 있는 녹원맨션이다. 녹원맨션을 시작으로 지역의 많은 택지개발지구에서 아파트를 건설하고 있을 때, 수도권에서는 분당, 일산 등 신도시 개발이 한창이었다. 이것을 수도권 지역으로 진출하는 발판으로 삼았는데 오늘날까지 많은 공사를 하며 호평을 받고 있다. 서울지역 진출 초기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어려운 문제들이 속속 터졌다. 자재난과 인력난에 부딪힌 것이다. 부동산 경기가 갑자기 좋아지면서 너나 할 것 없이 아파트사업에 손을 댔고 부동산 투기꾼들까지도 닥치는 대로 주택을 지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제일 큰 걱정거리는 품질에 영향이 없을까 하는 우려였다. 어떤 경우에도 품질만큼은 훼손시킬 수 없어 아무리 자재가 부족하고 비싸더라도 자재검수만큼은 철두철미하게 하도록 지시했었는데, 그것을 지금 사랑받고 있는 '화성파크드림'이 지켜왔고, 화성이 앞으로 지켜갈 가장 큰 가치인 것이다.

화성산업(주)동아백화점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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