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을 처음 만난 것은 1997년 가을, 나른한 토요일 오후였다. 당시 노 대통령은 총선에 실패하고 재기를 노리던 '백수' 정치인이었다.
수성구의 한 호텔 커피숍에서 정치부 기자였던 필자는 노무현, 이강철 씨 등 몇몇 인사들과 오랜 시간 마주할 기회가 있었다. 특별하게 의미를 둘 만한 자리가 아니어서 화제도 시시껄렁한 신변잡기가 전부였다.
노 대통령이 솔직담백하면서도 열정적으로 대화를 이끌어 가던 모습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때 노 대통령이 생수회사를 인수했다는 얘기가 나왔다. 나중에 대선자금 수사과정에서 야당의 집중 공격을 받던 바로 그 회사였다.
노 대통령은 "친구 회사에 투자했다가 아예 그 회사를 인수하게 됐다. 수익이 괜찮을 것 같다"는 투로 말했고, 옆자리의 인사가 "노 의원은 돈버는 데 재능이 있다"는 덕담(?)을 했다. 그러자 노 대통령은 "예전에 변호사를 하면서 벌 만큼 벌었고 부산에서 맨 처음 요트를 가져봤다"는 설명을 곁들이기도 했다.
그 당시 기자가 노 대통령에게 받은 인상은 돈에 상당하게 집착한다는 점이었다. 노 대통령이 얼마 전 공개석상에서 언급했듯, 먹고사는 데 고통받으며 성장했다는 점을 볼 때 몸에 밴 자연스런 가치관일 것이다.
당시만 해도 노동계층의 대변자이자 '청문회 스타' 이미지가 고스란히 남아있던 그에게서 진보적인 성향이 두드러졌지만, 경제 문제에서는 그가 혐오해온 보수적인 인사들의 성향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 보였다.
각종 이념이 판을 치던 80년대에 대학을 다닌 기자와 같은 세대들은 정치인의 진보성을 민감하게 살피게 마련인데 그에게서 균형이 다소 맞지않은 가치관을 발견하고는 약간의 아쉬움을 가졌던 기억이 난다.
그후 '정치 백수'였던 그가 대통령이 됐고 행정수도 이전, 공기업 지방이전 정책 등을 추진하는 것을 보고 내심 박수를 보냈다. 다른 정책은 논외로 하겠지만, 수도권과 한나라당 등의 반대를 무릅쓰고 역대 정권들이 시도하지 못했던 지방분권 정책을 과감하게 추진한 것은 역사적인 평가를 받기에 충분할 것이다. 기자는 공공기관 이전결정 과정을 취재하면서 날로 퇴색돼가는 대구'경북에 22개의 공공기관이 옮겨오는 것은 '오랜 가뭄에 단비'라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요즘 노 대통령에게 전혀 박수를 보내고 싶지 않다. 오히려 그 반대의 심정이다. 구미 문제가 단적인 증거다. 노 대통령이 지난 6월 수도권 내 대기업의 공장설립 허용을 시사하는 발언을 한 이후 이달 초 열린우리당과 정부는 수도권 공장 신'증설 허용을 전격 발표했다. LG그룹 3개사가 그 혜택을 보게 됐지만, 대구'구미의 피해액(23일 대구경북연구원 발표)은 5조 원을 넘어설 것으로 추산되는 등 지역 경제가 얼마후면 거덜날게 분명해졌다.
지난 2003년 정부가 파주에 LG필립스 공장 신설을 허가할 때부터 불거지기 시작한 문제였다. 정부가 지난 94년 YS정부 때부터 엄격하게 지켜온 수도권 공장총량제를 무시하고 LG그룹에 특혜를 줬기 때문이다. 현 정권의 공격대상이 돼온 보수 인사들도 지켜온 것을 지역균형 발전을 외치는 정권이 스스럼없이 깨버리는 아이러니를 지켜봤다. 대통령의 생각이 그럴진대 표(票)도 안 되는 지역민들이 아무리 떠들더라도 청와대와 정부가 꿈쩍도 않는 것은 지극히 당연할지 모른다.
삼성과의 관계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정권출범 초기부터 유착설이 나돈 데다 회장 처남의 주미대사 임명, 금산법 처리 문제 등에서도 노 대통령의 속내를 어느 정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이쯤되면 노 대통령은 삼성과 LG라는 한국의 대표 재벌들에게 경도돼 있다고 규정해도 무방하지 않겠는가. 노 대통령이 스스로 진보적인 정치인임을 자임해왔지만 자신에게 유리한 것만 받아들이는 속물(?)근성이 이번에 명확하게 불거져 나왔다고 한다면 너무 나가는 표현일까?
한가지 분명한 것은 노 대통령이 더 이상 지방분권, 균형발전이라는 말을 언급할 자격을 잃었다는 점이다. 공기업 100개를 지역으로 옮겨 오더라도 구미처럼 1년에 300억 달러 수출을 할 수도, 수만 명을 고용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박병선(기획탐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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