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 김영미씨의 눈물겨운 고난

입력 2005-11-16 10:23:48

압록강을 건널 때도 이렇게 힘겹지는 않았고, 몽골 사막을 걸어서 지날 때도 희망만은 갖고 있었습니다.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기면서도 미래를 꿈꾸며 견뎠습니다. 하지만 아들 둘을 잃고난(사망 당시 16세, 14세) 지금, 제게 남은 것은 화상으로 얼룩진 몸 하나 뿐입니다.

짐작하셨겠지만 전 탈북자입니다. 고향은 함경도 청진이고요. 2003년 2월 아들 둘과 함께 중국 땅을 밟았습니다. 남편은 감시가 심해 따라오지 못했어요. 살을 찢을 듯한 맹렬한 겨울바람을 뚫고 사선을 넘은 것은 아이들 때문이었습니다. 한창 클 나이에 굶기 일쑤인 아들 녀석들을 보는 것은 엄마로써 참기 어려운 고통이었어요.

조선족들이 모여 사는 연변에서 보모 일을 하며 생계를 꾸렸습니다. 북한에서 지내는 것보다는 형편도 한결 나았습니다. 하지만 언제 공안에 발각돼 북한으로 송환될 지 모르는 신세라 불안하기 짝이 없었지요. 남한으로 최종 목표를 정했지만 갈 길이 암담했습니다.

결국 몽골을 거쳐 남한으로 가기로 결정을 내렸지만 아이들이 문제였어요. 아이들은 행여나 공안에 붙잡힐까봐 인근에 살며 친해진 조선족 가족에게 맡겨 두고 혼자 길을 나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따라가겠다는 아이들을 얼른 돈 벌어 데리러 오겠다는 말로 달랬지요.

버스, 기차를 타고 내몽골 사막을 걷기도 하면서 20여 일 만에 몽골에 있는 한국대사관 문을 두드릴 수 있었지요. 여자 혼자 몸으로 언제 붙잡힐지 모른다는 두려움, 배고픔과 싸우면서도 포기하지 않은 것은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였습니다. 남한 땅으로 아이들을 데려와 제대로 먹이고 공부시키고 싶었어요.

남한 땅을 밟은 것은 2003년 6월, 하나원에서 적응교육을 마친 뒤 10월 대구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아이들 생활비를 보내주기 위해, 아이들 데려올 돈을 마련하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했어요. 늑막염에 걸려 고통스러웠지만 아이들을 위해 여관 청소일도 하고 닭 가공공장에서도 땀을 흘렸지요. 매달 120여만 원을 벌어 40만 원을 중국으로 보냈습니다.

지난 해 말 더 이상 아이들과 떨어져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언제 다시 북한으로 붙잡혀갈지도 몰랐으니까요. 악착같이 모은 돈과 여기저기서 빌린 돈, 정부에서 마련해준 영구임대주택을 반납하고 받은 보증금 200만 원을 합쳐도 1천만 원이 조금 넘을 뿐이었습니다. 중국에서 브로커를 통해 남한으로 들어오려면 1명당 1천200만 원이 필요한데 아이 둘을 데려오기엔 돈이 모자랐지요. 부족한 돈은 중국에서 어떻게든 마련해보려고 마음먹고 아이들을 찾아 나섰어요.

하지만 반가운 재회도 잠깐 뿐이었습니다. 아이들을 만난 지 보름쯤 지났을까. 우리가 머물던 공동주택에 가스폭발사고가 일어났어요. 이 일로 6명쯤 목숨을 잃었을 겁니다. 제 아이들도 눈을 감았지요. 며칠 간 의식을 잃은 뒤 깨어나서 아이들을 찾았지만 처참한 시신만 확인할 수 있었을 뿐이었어요. 머리는 멍해졌고 아무 생각을 할 수도 없었습니다. 제 마지막 희망을 잃어버렸습니다.

같은 고향출신 새터민(탈북자)의 집에 신세를 지고 있는 김영미(45·여·가명)씨는 왼쪽 눈을 제대로 감지 못한다. 입도 제대로 다물 수 없어 음식을 먹기가 쉽지 않다. 손가락 일부가 녹아내리고 서로 붙어 물건을 제대로 쥘 수 없다. 모두가 아이들 목숨을 앗아간 가스폭발사고 탓이다.

"병원에선 성형수술을 받으면 물건을 쥘 수 있다고 합니다. 나으면 일을 할 수 있을 텐데 가진 것이 없으니 수술받기가 막막하네요. 아이들은 떠나고 없지만 남한 땅으로 데려오려고 졌던 빚(1천여만 원)은 일해서 얼른 갚아야지요. 그래야 아이들도 편히 눈을 감을 겁니다." 채정민기자 cwolf@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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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중국에서 일어난 가스폭발사고로 두 아들을 잃고 자신도 중상을 입은 탈북자 김영미(가명)씨가 아들들을 그리워하며 슬픔에 잠겨 있다. 정운철기자 woo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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