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하신가, 말라버린 고사목처럼
미치도록 그리웠다. 지난 겨울에 봤던 황홀경, 상고대. 산 정상부근을 온통 뒤덮은 하얀 세상이었다. 그리움은 맹목적이랬다. 겨울까지 도저히 기다릴 수 없게 할 만큼.
가을비가 촉촉하게 내린 다음날인 지난 주말. 덕유산 향적봉을 올랐다. 행여 지난 겨울의 황홀경을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란 성급함에서다. 온 천지가 하얗지는 않더라도 나뭇가지를 덮은 서리꽃이라도 봐야 그리움은 진정될 것 같았다. 때마침 날씨도 추워질 거란 예보였다. 지난 10월31일에도 한차례 하얀 상고대 세상을 만들어냈다지 않았나. 희망이 솟았다.
아침 6시. 무주리조트 스키코스에서 출발했다. 설천봉까지는 1시간20분. 하지만 지난 겨울 황홀경을 펼치며 활짝 피었던 하얀 서리꽃은 없다. 전날 내린 빗물이 얼 정도로 춥지만 날씨가 너무 맑은 탓이다. 그나마 휑한 맘속을 다독여주는 것은 고사목. 수명은 다했으되 자태는 애틋하면서도 고고한 그대로다. 무성했던 가지와 잎은 떠났지만 대부분 그 형태를 온전히 갖추고 있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그렇게 오랜 세월을 한자리서 버텨온 고사목이다. 의엿한 고사목은 느긋하게 겨울까지 참지 못하고 상고대를 찾아 오른 성급함을 꾸짖는다. 야속한 날씨라고 생각한 좁은 속마음을 꾸짖는다.
다시 설천봉에서 향적봉까지 오른다. 15분 거리. 모진 바람에 손이 시리고 귀가 시리다. 이 추위에도 향적봉 아래 곳곳에 터를 잡은 주목들은 푸르름을 잃지 않았다. 그 의연함은 고사목이 되어서도 여전하다. 향적봉을 향해가는 산행은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라는 주목들이 있어 더 운치 있다. 여기에 서리꽃이 피면 기이한 모양을 한 고사목들이 배경이 되어 완벽한 구도의 사진을 만들어준다.
향적봉 정상에 섰다. 연이은 고봉들이 파노라마를 이뤘다. 앞쪽의 산들은 짙은 반면 뒤쪽으로 갈수록 색깔은 엷어진다. 이 색의 변화는 끝내 하늘과 맞닿고 파도처럼 이어지는 고봉들 위로는 깊고 푸른 하늘이 배경으로 한 몫 한다. 비로소 상고대를 보지못한 아쉬움도 가신다. 자연은 성미급한 인간에게 상고대를 감춘 반면 맑은 늦가을하늘을 보여줬다. 사방이 뚜렷하다. 남덕유산의 힘찬 산줄기도, 적상산 일대의 산봉우리들도, 그 아래쪽의 벌판까지도 선명하다.
이제야 깨닫는다. 어찌 자연을 탓하랴. 상고대도, 맑은 가을하늘도 자연이 주는 선물 아닌가. 비록 늦을지언정 상고대가 안 피는 경우는 없다. 아쉬워할 필요도, 안달할 필요도 없다. 그때까지 하얀 그리움을 간직하면 되는 것을.
글·박운석기자 dolbbi@msnet.co.kr
사진·박노익기자 noi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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