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옥입니다-11월

입력 2005-11-02 11:51:23

때는 11월'''.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일년 열두 달을 숫자로 매기는 대신 인디언식의 독특한 이름으로 부른다. 그들에게 11월은 '모든 것이 다 사라지는 것은 아닌 달'이다. 부족에 따라서는 다른 이름도 있다. 예컨대 크리크족은 '물이 나뭇잎으로 검어지는 달', 키오와족은 '기러기 날아가는 달'이라고 부른다.

가을의 끝자락이다. 온 천지의 잎지는 나무들은 저마다 마지막 정염을 불사르며 활활 타오른다. 하염없이 붉고 노란 산들. 한켠에선 소리없이 가랑잎들이 떨어지고, 다람쥐는 겨울 양식 운반으로 하루가 바쁘다. 해마다 이즈음의 단풍진 가을산을 보노라면 매번 현기증이 날 만치 곱다. 까닭없이 가슴도 울렁거려서 파도 앞에 선 청마의 외침처럼 "그래, 어쩌란 말이냐"고 구시렁거리고 싶어진다. 말없는 산을 향해 괜히 시비라도 걸고 싶어진다.

일상의 족쇄에 매여 허둥허둥 하는 사이 가을은 저혼자 깊을 대로 깊어졌다. "허~" 하는 탄식이 절로 나온다. 눈 몇 번 더 감았다 떴다 하다 보면 겨울이 성큼 다가올 테지. 그런 헙헙함 때문인지 산이라고 생긴 데는 어디랄 것 없이 단풍빛깔로 차려입은 사람들이 바글거린다. 살금살금 떠나려는 가을을 좀 더 오래 곁에 잡아두고 싶어하나 무릇 아름다운 것은 순식간에 지나가는 법임을 .

아무튼 이토록 미려한 계절에 일벌레처럼 일만 하거나 하루종일 컴퓨터를 껴안고 있다거나 뒹굴뒹굴 '방콕 신세'를 못 벗어난다면 '가을'에 대한 실례가 아닐는지.

어디론가 불쑥 떠나고 싶어지는 만추(晩秋)다. 남편의 축 늘어진 어깨도, 아내의 바가지 긁는 소리도, 아이들 성적 스트레스도, 궁상스런 일상도 훌훌 잊고, 보헤미안이 되어 발길 닿는 대로 가고 싶어진다. 이맘때면 우리의 오감도 한결 예민해지는지 자연의 속삭임이며 향기가 예사롭잖다. 프랑스의 시인이자 신학자인 알랭 드릴이 말한 바 "이 세상 만물은 책이며, 그림이며, 또 거울이거니"라던 말이 온 몸으로 느껴지는 계절이다.

너무 아름다워서 짧은 11월. 순간 순간 놓치고 싶지 않은 장면들로 가득 찬 사진첩 같다. 하기야 지난 후면 무엇인들 그립지 않은 것이 있으랴. 찰나의 거장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 "이 세상에 결정적 순간이 아닌 순간은 없다"고 말한 것처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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