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회 매일여성한글백일장 대상 '언어'

입력 2005-10-28 11:34:27

독이 되는 말, 약이 되는 말(우명식 / 안동시 용상동)

내가 무심코 한 말이 누구의 마음속에 지금 상처로 머무르진 않는지 가만히 생각해 본다.

말 한마디를 표현하더라도 아름다운 말 품위 있는 단어를 쓰는 것이 스스로를 높이는 일이라는 걸 잘 알고 있지만 우리는 남을 가혹하게 속단하고 상처 입히는 말을 너무 쉽게 한다.

아들과 약속한 시간이 촉박해 택시를 기다리다 마침맞게 오는 버스에 올랐다. 카드를 요금 단말기에 대자 '감사합니다'하는 맑은 기계음이 다급한 마음을 가라앉혀 준다. 의자에 앉아 무심히 창밖으로 시선을 보내며 몇 정류장을 지났을까. 기사 아저씨의 날카로운 금속성 고음에 버스 안은 긴장감이 돈다.

초등학교 2, 3학년 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반듯하게 접힌 돈을 요금함에 넣자 기사 아저씨는 험악한 얼굴로 "야, 임마 이 돈, 정말 천원 맞아? 혹시 반쪽짜리 아니야." 아이는 금방 주눅이 들어 모기소리만 하게 "아닌데요 "라며 안절부절못한다. 기세등등한 아저씨는 "야, 너 어느 학교 몇 학년 몇 반이야. 내가 반쪽짜리 돈을 접어서 낸 놈을 몇 번이나 잡았는지 알아, 너 만약에 속이면 카메라에 찍혀서 개작살난다."

순진하게 보이는 아이는 지은 죄도 없이 고개를 푹 숙이고 말이 없다. 나를 비롯해 버스에 탄 어느 한 사람 기사 아저씨에게 항의 한 마디 하지 못했다. 난 얼굴이 화끈거리고 부끄러워 아이를 쳐다 볼 수가 없었다.

어른의 잣대로 아이를 평가하고 지레 짐작으로 동심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는 어른의 모습을 넋 놓고 방관한 나 역시 아이에겐 가해자였던 것이다.

거침없는 말, 온순치 않은 눈빛, 말이 통할 것 같지 않는 아저씨의 고함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아이와 함께 그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머리와 가슴이 아우성을 쳤다. 나도 모르게 아이 손을 잡았다. 죄책감에 손이 파르르 떨렸다. "어디까지 가니? 아줌마가 데려다 줄게." 아이는 말없이 나를 따라 내렸다.

어릴 적 어른한테 돈을 받으면 여러 번 꼭꼭 접어 주머니에 넣어 두고 사라지지나 않았을까 수시로 보물처럼 꺼내보고 즐거워했다. 돈을 소중하게 다루어야 하는 법보다 어린 마음에 잃어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먼저였기에 손 안에 꼭 감싸 쥘 정도로 작게 접곤했었다. 아이 마음도 내 마음과 같았을 것이다. 아이의 맑고 고운 눈을 바라보며 짧은 순간 많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습은 무늬와 빛깔만 요란한 합성섬유를 닮아 분별없이 독이 되는 말을 무심결에 내뱉는다. 옛 어른들의 정갈하고 품위 있는 삼베옷을 닮은 무게 있는 말. 지혜롭고 예의 바른 말은 잊은 지 오래이다. 은어, 비어, 속어, 유행어가 난무하는 이 시대에 내면 깊은 곳에 곰삭은 남을 배려하고 포용하는 말, 희망과 위로와 기쁨을 주는 말이 새삼스레 그립다.

하나의 언어 속엔 하나의 세계가 숨쉬고 있다. 우리가 다른 동물들과 구별되어야 할 당당한 근거가 언어생활이고 인간만의 자랑스러운 특권인 것이다. 경솔한 속단과 편견으로 아이의 마음 밭에 독이 되는 말을 심어 버린 어른의 그릇됨을 대신 용서받고 싶다.

'에밀'의 저자 루소는 교육의 첫 과제가 아이들에게 말을 똑똑하게 하도록 가르치는 일이라고 했다. 어려서부터 말을 바르게 하지 않으면 귀에 거슬리고 싸우는 경우가 많다.

내면의 아름다움은 보지 못하고 겉치레에 후한 세상에서 위선과 아첨, 편견과 아집에 사로잡혔던 자신을 돌아보고 겸허하고 분별있는 말을 마음자리에 심어야겠다.

세상을 움직이는 건, 돈이 아닌 인격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언어에도 격(格)이 있다고 했다. 사랑과 희망을 담은 말은 가슴을 설레게 한다. '고맙습니다. 행복하세요. 사랑합니다. 당신이 있어서 세상은 아름답습니다.'

아이 손을 힘주어 잡고 약이 되는 말을 눈빛으로 살며시 보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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