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함께

입력 2005-10-13 15:10:03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기형도(1960~1989) '엄마 걱정'

어린 날 빈방에서 혼자 어머니를 기다려 보신 적 있는지요? 날은 어둑어둑 저물고, 간간이 비바람 소리는 짐승의 울부짖음처럼 들리는데 왜 그렇게도 빈방의 쓸쓸함은 크게만 느껴지던 것인지요. 세상의 모든 어린이들은 이 작품에 등장하는 소년처럼 빈방의 고독을 체험하면서 비로소 어른으로 성장해갑니다. 아동들에게 있어서 빈방은 보다 힘들고 어려운 현실 속에서 스스로를 버티며 이겨 나가는 것을 배우는 최초의 학습 장소인지도 모릅니다.

기형도! 이 젊은 시인은 이미 우리 곁에 있질 않습니다. 소년시절의 가난과 불우했던 기억들은 그의 작품에서 눈물처럼 곳곳에 배어있습니다. 흘러간 1980년대 후반, 내가 {백석시전집}을 발간하고 감격스러워할 때 신문기자 기형도와 전화로 인터뷰를 나누던 그 나직하고 잔잔한 목소리를 아직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시인이여! 비록 머나먼 곳에 계시지만 그 목소리를 한 번만 다시 들려줄 수는 없겠습니까?

이동순(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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