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풍-총칼로만 망하는 건 아니다

입력 2005-10-13 11:48:58

두보(杜甫) 시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는 요시가와 고지로이다. 경도대 교수였던 그는 에즈라 파운드가 두보 시를 영역할 때 감수를 해 줄 정도였다. 국내에도 요시가와가 쓴 '한무제' 등 여러 저서가 번역돼 있다. 하여튼 요시가와는 일본이 조선을 삼키고, 중국까지 먹으려고 야욕을 뻗치던 제국 시절에 중국 연구자로서 중국식 옷을 입고, 편지도 부모님께 보내는 것 외에는 전부 한자로 썼다.

"진정한 외국 연구는 그 민족의 생활에 스며 있는 인과의 법칙이나 문화 양상을 그대로 보아야지, 입맛에 맞춰서 키우거나 줄이면 진실을 놓치기 쉽다"고 믿은 요시가와는 '일본식 행동'을 요구하는 정부의 협조를 번번이 거절하여 미운털이 톡톡히 박혔다. 수시로 헌병들이 찾아가 괴롭혔다. 그래도 "나의 중국 연구를 막으려면 차라리 내 생명을 가져가라"고 단호하게 고초를 견뎌 나갔다.

종전 후, 중일 수교를 앞둔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중국통인 요시가와에게 초청장을 보냈다. 중국인들이 마오저뚱(毛澤東)보다 더 존경하는 혁명 지도자인 저우언라이는 최근 생전에 중국 국수주의자들의 역사 왜곡을 통렬히 비판하며, 중국의 팽창주의로 고대 한국의 영토가 침탈된 데 대해 사과하며, 고조선-고구려-발해사가 모두 한국사라고 한 발언이 공개돼 국내에서도 다시 관심을 끌고 있다.

패전한 일본이 아직 중국과 국교를 맺지 않았던 시절, 저우언라이는 당시 日'中 우호협회 회장이던 요시가와를 회원들과 함께 베이징으로 초청했다. 저우언라이는 중국 사람보다 더 중국을 잘 알며, 중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전시에도 중국을 사랑한 요시가와에게 감사함을 표현하며, 관저로 초청하여 만찬을 제공했다. 그런데 요시가와는 공식석상에서는 물론이고, 사석에서도 단 한마디의 중국어를 쓰지 않아 서운했다.

저우언라이가 "지중파(知中派)인 당신이 어째서 '니하오마'(안녕)는 물론, '쉐쉐'(고마워)라는 말조차 하지 않습니까"라고 묻자 대답했다. "우리 일본이 이겼으면 당연히 중국말을 썼을 겁니다. 조국이 무릎을 꿇었는데, 어떻게 제가 승전국인 중국의 말을 쓰겠습니까."

저우언라이는 무릎을 탁 쳤다.

"아, 일본에는 이런 정신이 있구나. 이 정도의 학자가 있으니 일본은 금방 일어나겠다"며 즐거운 마음으로 공항까지 나갔는데, 끝내 "사요오 나라~"라는 일본식 인사밖에 듣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우언라이는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중'일 국교 정상화를 이뤄냈다. 저우언라이가 죽었을 때 그를 추모하는 열기가 톈안먼 사태로 터지기도 했다.

이런 게 바로 인간, 조국, 문화를 얘기해 주는 게 아닐까 싶다. 많이 배웠든, 적게 배웠든 자기 분수를 지키며 주어진 시간 앞에서 양심을 따라 치열하게 살아가는 구성원이 많아질 때 그 나라와 지역은 중심을 잡고 발전해 간다. 그런데 2005년 10월, 대구'경북의 현실은 어떠할까.

지난 6월부터 대구'경북의 정신을 되찾기 위한 '영남문화인물사'를 매주 토요일마다 연재하면서 문헌을 뒤지고, 유족이나 지인을 만나면서 두 번 놀란다. 한번은 대구, 경북이 지닌 정신적인 자산, 문화적인 유산이 엄청나게 많다는 데 놀라고, 또 한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 문화 자산을 중요하게 여겨서 제대로 그를 지켜나가기 위한 노력을 거의 하지 않았다는 데 더욱 놀란다.

지방자치단체가 정책적으로 보호해 주지도 않았고, 민간인들이 시민 운동 차원으로 갈무리한 흔적도 잘 보이지 않는다. 그저 온갖 핍박을 받으면서도 유족과 후손들이 그들의 흔적을 지켜가고 있으나 전폭적인 지원이 없으면 그나마 멸실의 순간은 금방 다가올 것 같다.

이쾌대, 이인성, 윤복진, 김유영, 김성칠, 임환경, 허기석, 이상화, 이장희, 현진건, 김석형 등 앞서 간 선대들이 창조해 낸 격조 높은 문화와 예술, 학술 성과를 지역의 살아 숨쉬는 역사로 자리매김하는 날은 언제일까. 민족이나 지역 사회가 총칼로만 망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안의 보배를 마구 버릴 때 이미 우리는 죽은 목숨이다.

최미화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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