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혼자였다. 이렇게 병원 한쪽에 쪼그리고 앉아있어도 이 세상에 날 봐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차라리 큰 병에 걸렸다는 사실이 다행일까. 철도길 옆에서 밤을 새우는 이런 삶일 바에야 죽는 게 낫지 않을까.
네 살 때 형이 맹장염으로 죽었지. 당시 의술로는 고치기 힘든 병이었다고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형이 죽은 그 해, 아버지가 화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서구 비산동에서 구멍가게를 했던 어머니는 가게에 딸린 작은 방에서 날 키웠다. 쌀이 없어서 과자를 먹었다. 아이들은 아빠 없는 아이라고 놀려 대기 시작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공장 이곳저곳을 전전했다.
어른들은 날 부려먹고 곧잘 버렸다. 우산을 만드는 공장에서 4개월 정도 일했지만 키 큰 아저씨는 이 핑계 저 핑계로 돈을 주지 않았다. 리어카 제조공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월급이 3만 원 정도였는데 나에게는 한 푼도 돌아오지 않았다. 거기다 무슨 일이 생기면 내 탓이랬다. 조그만 놈이 돈만 밝힌다며 나 같은 놈은 필요 없다고 했다. 어려서 몰랐고 못 배워서 늘 타박만 받던 내가 갈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열여섯이 되던 해 상경했다. 담뱃갑 하단에 작은 광고문구를 넣던 사무실에 취직했다. 한 1년 정도 일하고 밀린 월급을 받기로 했던 그날, 사무실에는 차압 딱지가 붙었다. 사장은 어디론가 자취를 감췄고 함께 일했던 형들도 찾을 수 없었다. 서울 종암동의 한 두부공장에서 물건 나르는 작업을 주·야간으로 했다. 3개월 일하니까 6만 원을 줬다. 내 나이 열여덟 살. 첫 월급이었다.
대구의 어느 자동차수리센터에서 일하던 어느 여름밤. 구멍가게에 딸린 작은 방에서 어머니는 싸늘하게 식어있었다. 남편과 장남을 동시에 잃었던 어머니는 늘 술을 마시고 울었다. 가게에서 3일장을 치르고 성주의 한 야산에 어머니를 묻던 그날, 처음으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지독하게 외로웠다. 나는 세상에 혼자 남겨졌던 것이다.
서구 내당동 한 가내수공업사에서 좀약을 만들었고, 수성구 범어동에 있는 한 새시공장에서 기술을 익혔다. 글자도, 숫자도 잘 몰랐던 나는 월급을 받는 족족 동료에게 저축을 부탁했다. 은행 문턱은 내게 너무 높았다. 동료가 돈을 들고 없어진 것도 그를 알고 지낸 지 꼭 5년 만이었다.
나는 남들이 말하는 노숙자가 됐다. 결혼은 하지 못했다. 꼬이고 꼬였던 사회생활에서 모은 돈은 한 푼도 없었다. 계명대 캠퍼스에서 몇 개월을 보내는 동안 왼쪽 시력을 잃었다. 노동판을 찾아갔지만 초점이 잡히지 않아 물건을 제대로 주울 수조차 없었다. 오른쪽 눈에 백내장이 왔다. 다시 새시일을 시작했다. 남구 대명동에 월세 6만 원하는 방을 얻었고 월급을 20만 원 정도 받게 된 것도 최근의 일이다.
2주 전 위암 3기를 선고받았다. 늘 속이 쓰렸고 밥을 먹으면 체한 듯 묵직했다. 위장약을 아무리 먹어도 낫지 않기에 병원을 찾았다. 암세포가 위 전체에 퍼져 위를 덜어냈다. 저축한 돈 110만 원을 내고 나니 또 한푼도 없다. "아무것도 없는 게 왜 까불어?"라고 사람들이 놀려 댔다.
나는 달팽이관에서 살아온 것 같다. 시커먼 관 속에서 아무리 헤쳐나오려 몸부림쳐도 계속 꼬였던 인생이었다.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 않았던 서러운 삶이었다. 다시 태어난다면 꼭 '가정'을 갖고 싶다. 웃음과 따뜻함으로 가득한 그런 가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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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현기자 ssang@msnet.co.kr
위암 3기 판정을 받은 김춘근(54)씨는 평생 외롭게 살아왔던 자신의 삶이 요즘처럼 힘겹게 느껴진 적이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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