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공직자들이 내무부를 선호했던 이유 중 하나는 시장'군수를 할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운 좋게 서울 근교나 고향에라도 가게 되면 말 그대로 금의환향이었던 것이다. 나도 공직 시작 25년만에 부천시장이 되었는데, 발령 날짜가 1986년 1월 1일 새해 첫날이었다.
당시 부천은 인구가 일년에 수 만 명씩 폭증하고 있었다. 그러니 각종 도시문제들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는데, 가장 심각한 것이 물 부족이었다. 시민들의 불만이 얼마나 컸던지 어느 날 아파트 단지를 방문했을 때는 시장이 왔다는 소식에 불과 몇 분도 안 되어 수 백명의 주민들이 나를 에워쌌다. 그리고는 "시장은 물을 먹느냐, 우리는 밥할 물도 없다"는 고함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나와 험악한 분위기가 조성됐다. 그러나 그때까지 부천시의 대책은 2년 뒤 팔당댐에서 인천까지 연결되는 광역상수도가 완공되기를 기다리는 것 뿐이었다.
앞으로 2년이나 물 없는 고통을 겪어야 하는 주민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했다. 내무부 행정과장 시절에는 가끔 시장'군수의 위기관리 능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는데, 내가 당사자가 되어 위기를 맞고 보니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며칠간의 고민 끝에 문제 해결을 위한 두 가지 원칙을 세웠다. 우선 목 타는 주민들에게 단 하루라도 빨리 물을 공급해 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당장 해야 하고, 다음은 정부의 광역상수도 계획을 믿을 수 있도록 주민들을 충분히 이해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생각으로 우선 부천에서 20여km 떨어진 성산대교 아래의 한강물을 끌어오자고 했더니 간부들은 2년 뒤면 좋은 물이 공급되는데 굳이 수 십억 원을 들여 무리할 필요가 있느냐며 반대했다. 아마도 예산낭비에 따른 책임 문제를 걱정했던 것 같다. 나는 부천에는 앞으로 공장이 많이 들어설 것이므로 나중에 공업 용수로 전환하면 되고, 유사시 팔당댐에 문제가 생기면 비상급수로 활용할 수도 있다며 설득했다. 가장 고통이 큰 고지대 주부들을 버스에 태워 팔당댐 공사현장과 성산대교를 둘러보게 했다. 근 두 달을 그렇게 하고나니 새로 온 시장을 한 번 믿어보자는 분위기가 확산되었고, 몇 년 동안 골칫거리였던 물 시위는 사그라졌다. 또한, 그로부터 6개월 뒤 주민들은 목마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일을 겪으며 행정에 있어 미래 예측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금 마음에 새기게 되었다. 만약 부천의 인구 증가 속도를 감안하여 상수도 정책을 미리 세웠더라면 주민들은 불필요한 고통을 당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또한 신속한 의사결정과 흔들림없는 추진, 주민들의 마음을 얻으려는 노력이 결합되면 어떠한 난제도 풀 수 있다는 교훈을 얻게 되었다. 부천에서의 1년은 그래서 소중했다.
이의근 경북도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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