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바다 식민의 바다

입력 2005-08-20 14:21:31

주강현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1543년 8월 25일 일본 규슈의 최남단 가고시마에서도 한참 떨어진 섬 다네가시마에 한 척의 난파선이 도착했다. 당시 아시아 쪽으로 진출해 있던 포르투갈 상단이었다. 다네가시마의 도주 도키타카는 그들이 가진 쇠막대기에 주목했다. '꽝'하는 소리와 함께 표적물을 박살내는 신기한 물건. 도키타카는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무려 10억 원에 달하는 거금을 주고 총을 구입했다. 일본 무기사에서 총의 시대가 열리는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약 100년 뒤인 1653년 8월 15일, 네덜란드를 출발해 일본 나가사키로 향하던 하멜 일행이 제주도 해안에 표착했다. 하멜 일행이 한양으로 호송됐을 때 조선 백성들의 관심은 대단했다. 구경꾼이 많아 길거리에서 사람들을 헤치고 가기에 곤란했고, 또 그들의 호기심이 어찌나 굉장하였던지 우리는 집에서도 한가롭게 있을 수가 없었을 정도. 36명이나 되는 하멜 일행은 이후 13년간이나 조선에 머물렀지만 조선 정부가 서양과학기술을 탐구했다는 어떠한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바다를 문명 교섭의 통로로 끌어안은 일본과 그저 변방의 '갯것'들 정도로 외면해버린 조선. 제국 일본과 식민지 조선의 운명은 거기서 결정됐다. 다네가시마에서 시작된 서양 총은 일본에 퍼지면서 곧 임진왜란을 일으키는 힘의 근본이 됐다. 하지만 아무런 세계정보를 획득하지 못한 채 해금정책만 강조한 조선의 반해양(反海洋)적 사고는 결국 조선이 세계화의 조류에서 밀려나 식민지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는 원인이 됐다.

'제국의 바다 식민의 바다'는 제국과 식민의 연대기를 해양문화사적 관점에서 조명한 책이다. 역사민속학자로 활발한 연구활동을 펼치고 있는 저자는 독도와 울릉도, 진해, 거문도 등 국내뿐만 아니라 일본 대마도와 가고시마, 시모노세키 등을 거쳐 남태평양 팔라우까지 아시아의 바닷가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해양사의 역사적 연원과 현재, 미래를 조명한다.

저자는 '왜 조선은 세계화의 조류에서 밀려났으며, 일제의 식민지가 됐는가', '일본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저의와 근거는 무엇이며, 동해라는 이름이 어떻게 일본해로 둔갑했는가'라고 묻는다. 그가 찾은 해답은 '바다'다. 해양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의 부재가 제국과 식민의 명암을 가른 결정적 원인이라는 것. 일본과 제국주의 열강에게 바다는 광대한 가치를 지닌 국가경영의 중심이었다. 대항해시대 이후 세계사의 흐름을 바꿔 놓은 문명의 교류는 바다에서 이뤄졌다. 19세기와 20세기 한반도 역사를 요동치게 했던 모든 열강들 역시 해양세력이었다.

하지만 우리에게 바다는 변방이었다. 바다 사람들은 천대받는 '갯것'들이었다. 조선 숙종 때 에도의 바쿠후(幕府)로부터 울릉도가 조선 땅임을 확약받았던 안용복은 끝내 귀양살이로 내팽개쳐졌다. 제멋대로 국경을 이탈하고 외교문제에 개입하는 월권을 저질렀다는 게 이유였다. 조선 성종조 울릉도를 개척했던 김한경은 극형에 처해지고 그의 딸은 노비로 팔려갔다. 있지도 않은 울릉도의 실재를 주장했다는 것. 한국 전쟁 와중에 독도를 침범하는 일본인들을 온몸으로 막아냈던 홍순칠 의용수비대장은 1980년대 초반 정보기관에 끌려가 곤욕을 치러야 했다. 북한에서 그를 영웅 대접하는 방송이 흘러나왔다는 이유가 뒤에 붙었다.

저자는 "'육지사와 해양사', '중심과 변방'의 질서를 뒤집는 생각의 전복이 역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 같은 '생각의 반란'을 토대로 바다를 통해 과거를 되씹고 현재와 미래를 본다면 우리 역사와 세계사를 바라보는 지평이 달라질 수 있다는 설명이다.

저자는 한반도의 바다와 육지를 다시 침탈하고자 하는 일본을 '신(新)왜구'라 지칭한다. 책은 '신왜구'의 역사적 뿌리를 찾기 위해 한국, 미국, 일본, 러시아에 이르는 대장정에 오른다. 메이지유신과 정한론의 사상적 고향인 가고시마와 시모노세키는 물론 왜구의 침탈사를 보여주는 진해와 거문도, 한·일 선린과 대결의 전초기지인 쓰시마와 이키제도, 대항해시대 일본과 서방의 교류처였으며 조총의 원형인 철포가 처음 전래된 다네가시마와 나가사키 데지마 등지를 찾아 역사의 장면들을 복원해낸다.

필체는 현장감이 살아 있고 국내에선 보기 힘든 사진자료와 그림, 지도도 풍부하다. '사쓰마의 영국 유학생들'이나 '이와쿠라 사절단' 같은 사진은 세계 사진사에서도 주목되는 명품. 독도 영유권 분쟁과 동해 표기를 둘러싼 적합한 논리를 일반인들이 어렵지 않게 체득할 수 있도록 한 점도 이 책의 장점이다.

장성현기자 jacksoul@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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