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봄, 밭에 일 나갔다가 범을 봤다니까. 아! 글쎄, 참깨 모종을 뽑고 있는데 옆에서 꿩 몇 마리가 화닥닥 날아가더라고. 그 순간 황소처럼 누런 범이 한걸음에 4∼5m를 뛰어 숲 속으로 들어가는 게야. 놀라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달려왔어."
김태순(74) 할머니가 갑자기 범 이야기를 꺼내자 아들인 조기호(46)씨가 거들었다. "그날 이후 한동안 마을 주민들은 밤에 문고리에 철사를 동여매고 밤을 지샜습니다. 그해 산에서 범을 봐 기겁을 하고 마을로 내려온 후 원인 모를 병에 걸려 2년 만에 죽은 주민도 있었죠.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등골이 오싹해집니다."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 모습이 너무 실감난 것일까.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할머니댁에 놀러와 있던 조아영(대구 동인초교 6년), 조병찬(대구 동인초교 3년)군이 "정말로 호랑이 봤어요?"하며 할머니 품에 꼭 안긴다.
믿기지않기는 기자도 마찬가지. 하지만 마을을 둘러싼 산세를 보면 그럴 법하기도 하다. 시간이 멈춘 듯, 원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이곳은 군위군 고로면 학성2리 속칭 안용마을.
고로면사무소에서 서쪽으로 계곡을 따라 5.5km를 올라가야 겨우 만날 수 있는 이 마을은 아직까지도 전기가 없다. 때문에 냉장고는커녕 선풍기조차 구경할 수 없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호롱과 양초, 랜턴 등은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다.
그래도 요즘은 나은 편. 태양열을 배터리에 모아 몇 시간이나마 조그만 전구는 켤 수 있다. 차량용 5∼7인치 흑백TV도 제한적으로 본다. 그러나 해가 짧은 겨울에는 온 마을 주민들이 오후 5시만 되면 잠자리에 든다. 대신 자정이 되면 다시 일어나 밤참을 먹는다. 하루 네 번 식사를 하는 셈.
집집이 대문이 없는 안용마을에는 5가구 8명이 한 가족처럼 오순도순 살아간다. 토박이는 시집와 올해로 55년째 살고 있는 김태순 할머니와 조기호씨. 이상후(69)·박영난(66)씨 부부와 김대식(47)·구선자(45)씨 부부는 몇 년 전 들어왔고 지금은 대구의 한 50대 부부가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마을을 찾는 새 이웃이 됐다.
세상과 동떨어진 이 깊은 산골짜기의 반장을 맡고 있는 조씨는 마을에서 '대통령'으로 불린다. 마을의 일은 물론 인근 산 속 곳곳까지 모르는 게 없다는 뜻이다. 조씨는 "계곡 앞에 있는 산을 두 개 넘으면 넓은 평원과 정글이 있어 마치 '아마존' 같다"며 "주민 중에는 거기까지 가 본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
조씨는 벼농사 3천 평과 참깨·고추·옥수수 등 밭농사 1만2천 평 등 1만5천 평의 땅을 일구며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조씨의 주 수입원은 송이버섯. 대구에 있는 부인과 아들 둘을 뒷바라지할 수 있게 하는 '효자'다.
사실 이곳에서 농사는 수익을 기대할 형편이 못된다. 멧돼지 등 산짐승들의 극성이 해가 갈수록 더하기 때문이다. 주민들의 불만도 크다. 피땀 흘려 가꿔봤자 산짐승의 차지가 될 뿐이고 설령 잡을 경우에는 밀렵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기 때문에 속만 태우고 있다.
8년 전 이곳에 정착한 이상후씨네는 전원생활을 즐기기 위해 내려왔다. 농사를 지으며 자급자족하는 덕택에 생활비는 월 20만 원이면 족하지만 생활불편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씨는 "한 달에 한 번 병원에 가기 위해 대구에 나가는데 길이 험해 1박2일은 족히 걸린다"며 "고향에 갈 생각도 했지만 문명의 때가 묻지 않은 안용마을을 택한 게 지금은 잘한 일 같다"고 귀띔했다.부인 박씨는 "태양열 전기를 아끼기 위해 텔레비전 드라마를 마음 놓고 못 보는 게 아쉽다"고 털어놓았다.
마을 제일 끝 집에는 대구에서 지난해 7월 요양차 온 김대식씨 부부가 살고 있다. 김씨는 이곳에 온 뒤 낮에는 시원한 계곡 바람을 쐬며 다슬기를 잡고 밤에는 풀벌레 소리에 취해 살면서 하루하루 건강이 나아지고 있다. 김씨 부부는 "무릉도원(武陵桃源)이 따로 있겠느냐"며 "건강을 되찾더라도 떠나지 않을 것"이라며 자랑했다.
안용마을에는 요즘 경사가 겹쳤다. 하나는 주민이 모두 5가구가 되면서 농어촌전화촉진법에 따라 최근 군위군이 사업비 1억 원(국비 7천100만 원, 군비 2천400만 원, 주민부담 500만 원)을 들여 전기선로공사를 하고 있는 것. 덕분에 주민들은 요즘 TV와 냉장고 등 각종 전자제품을 구입할 꿈에 부풀어 있다.
또 하나는 대구에 사는 이오기(46)·양지연(39)씨 부부가 최근 이곳에 400여 평의 땅을 구입하는 등 이 마을에 살기를 원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는 것. 이씨는 그러나 "건축허가가 나오지 않아 마을에서 살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며 은근히 불만을 쏟아냈다.
밤이면 서까래 사이사이로 별들이 반짝이고 부엉이, 뻐꾸기, 개구리, 풀벌레 우는 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려오는 안용마을. 하룻밤만 보내고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돌아와야 했지만 가슴에는 무더운 이 여름이 다 가도록 잊지못할 추억 하나가 남았다. 주민들이 모두 잠든 사이 마을 앞 계곡에서 혼자 목물을 하고 난 뒤 삼복더위에 이불을 덮고 잠을 청하는 기쁨을 누가 또 아랴.
군위·이희대기자 hdlee@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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