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로스'

입력 2005-07-14 18:31:05

'에로스'(2004년)는 참 직설적인 영화제목이다.

에로틱한 관능의 이야기가 철철 묻어난다. 거기에 영화에 참여한 거물급 감독들의 고집스런 시선으로 인해 제목만으로 이미 '한 칼' 한다.

'에로스'는 94살의 이탈리아 거장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의 스티븐 소더버그, 동양적인 에로틱 아티스트 왕자웨이가 30분씩 나눠 옴니버스로 만든 영화다.

'야한 영화'를 가장 손쉬운 장르로 오해하는 분들이 많다. 기껏해야 몸 뜨거운 여인의 남성 편력 정도. 몸이 달았는데, 연기가 뭐 필요하며 의상이며, 배경이 뭐 필요할까. 시나리오며 연출은 또 어떻고. 그러니 아무나 만들 수 있는 것 아니냐고 이해한다.

그러나 몰라도 한참 모르는 것이다. 그렇게 따지면 액션영화는 몸 근질근질한 어느 놈의 몸부림, 전쟁영화는 전쟁놀이에 미친 어느 놈의 총질 아닌가.

'에로틱'은 터져 나오는 육체의 욕망과 이를 터부시하는 사회의 관습, 이를 거부하는 자아 등 아주 복잡한 메커니즘 속에서 만들어진다. 이런 복잡함을 거부하고 단순히 몸이 교접하는 그 절정의 순간만 따지는 것은 그동안 '설악산 가면서 1편, 가서 1편, 오면서 1편을 만든다'는 싸구려 에로영화를 너무 많이 본 탓이다. 그렇다면 '에로스'는 어떨까? 사실 조금 머리 아프다. 우리가 아는 에로틱과는 다르다.

안토니오니의 에피소드는 '위험한 관계'. 권태기 부부가 해변가에 와서도 여전히 티격태격하다, 남편은 관능적인 여인을 만나 관계를 가지고, 그 여인은 완전나체로 바닷가에서 춤을 추다가, 역시 완전나체로 춤을 추는 그의 아내와 만나 처음 보는 사이면서도 "어, 웬일이세요?"라는 표정을 지으며 영화는 끝난다.

이 여인들이 체모를 드러내고 해변가에서 춤을 춘다고 '야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워낙 난해하니까 '투박하다', '관객에게 불친절하다', '너무 늙은 것 아냐?' 등의 평이 나온다. 안토니오니는 '소통'과 '느낌'으로 에로스를 그렸다. 에로스의 완성은 결국 느끼고 소통하는 것이다. 영화 속 셋은 어긋버긋하다. 그래서 계단이며 길, 문들이 겨우 차 한대, 사람하나 지날 수 있도록 그렇게 좁았나?

소더버그 감독의 '꿈속의 여인'은 남자의 훔쳐보기 강박증세를 그렸다. 꿈만 꾸면 미모의 여인이 나타나는 주인공이 심리치료를 하는데, 치료사는 그 순간에도 길 건너 뭔가(아마 여인?)를 훔쳐보는데 신경을 쓴다는 얘기다. 3인 3색의 에피소드 중 가장 관객의 마음을 흔드는 것은 왕자웨이 감독의 '그녀의 손길'이다. 견습 재단사 장(장첸)이 고급 콜걸 후아(공리)를 만나러간다. 방안에서 후아의 신음소리가 들려온다. 자신도 모르게 몸이 반응하는 장. 후아는 장의 옷을 벗으라고 하고 손으로 그를 쓰다듬는다.

장은 그녀의 손길을 잊을 수 없다. 다른 남자를 만나는 그녀를 위해 옷을 정성스럽게 만들 뿐, 부드러운 촉감을 간직한 채 혼자만의 사랑을 키운다. 어느 덧 세월이 흘러 후아는 버림받고, 병까지 들었다. 그래도 장은 여전히 후아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 과연 그의 사랑은 이뤄질 수 있을까.

노출이 없으면서 자극적이고, 세속의 묻는 때 속에서도 영화는 탐미적인 색채로 빛을 발한다. 금방이라도 바짓단 속으로 그녀의 손길이 들어올 듯 하다. 특히 공리와 장첸의 애처로운 연기가 가슴을 찡하게 만든다.

세편의 에피소드는 '보고'(소더버그), 만지고(왕자웨이), 느끼는 것(안토니오니)'에 대한 이야기다. 동서양과 세월의 차이는 있지만 '에로스'는 이 세 가지가 기본 틀이다. 이 단순한 육감의 이야기를 이렇게 관능적으로 그려낸다니 역시 거장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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