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성 언어폭력·정치 악용 / 인터넷 실명제로 정상화를
말은 그 사회를 반영한다. 전혀 다른 사회를 만들기도 한다. 새로운 말은 그 유형이 천차만별이며, 우리 사회의 밝고 어두운 현주소를 다각적으로 비춰 보인다. 느리게, 또는 빠르게 당대 사회를 거울처럼 비추지만, 빠르게 떠오른 말들은 대개 빠르게 사라지곤 한다.
디지털 세대의 인터넷 세상에는 새로운 말들이 넘쳐난다. 그 말들은 아날로그 세대를 당혹감에 빠뜨리기 일쑤다. 두껍고 높은 벽이나 담장 안에 '별천지'가 펼쳐지기 때문이다. 그 세상에는 그들만의 특이한 공간이 있고, 그 안에 빠져든 청소년들이 마치 외계와 같은 세계에서 유영한다고나 할까. 하지만, 그 중심에는 무작위로 돋아난 특정 문자들이 판을 치게 마련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사이버 공간은 영어·한자어·일본어까지 합세한 말 등 '일그러진 기형 언어'들의 도가니라해도 지나치지 않다. 철자법·띄어쓰기·받침마저 무시되며, 그런 '합성 기호'들이 난무하면서 언어의 정연한 질서를 마구 뒤흔들어 놓는다. 그뿐 아니라 온라인의 익명성에 기댄 채 언어폭력, 한글 파괴로 치닫는 파행은 위험수위를 한참 넘어서 버렸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나 비속어·유행어·욕설 등이 없었던 건 아니다. 그러나 그 정도와 빛깔이 문제다. '언어 독버섯'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네티즌들의 '나쁜 은어·속어'의 경우 포털 사이트들까지 금칙어로 여길 정도다. 하지만, 독버섯 같은 새 변칙어들은 젊은이들 사이에 급속도로 번지면서 고삐 풀린 망아지를 연상하게 할 지경이다.
포털 사이트에는 금칙어를 교묘하게 바꾼 변칙어들이 활개를 쳐온 지도 이미 오래다. 변칙 키워드로 회원들을 모으는 불법 카페들이 범람하고 있어 당국이 통제하기엔 힘이 턱없이 미치지 않는다. 유해하다고 판단되면 금칙어로 등록해도 네티즌들이 만드는 변칙어를 따라잡을 수 없는 형편이다.
컴퓨터와 인터넷은 날로 위력이 커지는 가운데 어른들까지 욕설과 비방, 터무니없는 인신공격을 퍼붓는 공간이 되고 있어 우리 사회를 뿌리째 흔드는 느낌이다. 2002년 대선 때 '넷심(인터넷의 위력)'을 절감한 바 있듯이, 정치권은 더욱 그렇다. 정치권은 네티즌들의 '댓글 정치'에 요동쳐 "국민의 대의 기관인 국회는 없고 네티즌 정치만 있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는 판이다.
'대의 민주주의'라는 화려한 수식어 뒤에 숨은 감성적 여론 몰이와 집중적인 공세에 불을 댕기는 '네카시즘'은 그 위력이 이젠 공룡에 비견되기도 한다. 이 걷잡을 수 없는 힘은 익명성을 전제로 한 일부 네티즌들의 언어폭력인 데다가 정치적으로 악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반드시 경계돼야 한다. 정치권이 그 눈치나 보고, 그런 국민이 바람몰이에 휩쓸린다면 나라의 장래는 어두워질 수밖에 없다.
정부가 '인터넷 실명제' 도입 검토에 나설 모양이다. 일정 특정 사이트의 댓글 등에서 시작한 뒤 단계적으로 확대하는 방안을 연구 중이라고 한다. 인터넷 세상에서 무차별로 이뤄지는 인권 침해·명예 훼손 등의 사이버 폭력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반길 일이다. 올바른 '인터넷 강국'의 새로운 위상 정립을 위해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시민단체와 네티즌들의 반대 여론도 만만찮듯이, 인터넷 실명제는 '표현의 자유'와 '사이버 폭력'이 대비되는 민감한 사안이므로 신중한 접근이 요구된다. 표현의 자유를 위축, 올바른 여론 형성을 막고 비판 기능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반대 입장에도 일리가 있다. 실명과 주민등록번호 기재가 개인 정보 유출을 확산시킬 수 있다는 우려도 간과할 수는 없다.
아무튼, 인터넷은 누구나 자유롭게 견해를 펼 수 있는 '열린 공간'이며, 소통과 토론의 '사이버 만주주의의 장'이라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익명의 역기능'이 순기능보다 점점 커져 인터넷 강국에 먹칠을 해서는 안 될 일이다. 부작용 등 그 폐해가 날로 심각해진다는 점이 우선적으로 고려되는 건 옳다. 다만, 실명제 도입에 따른 문제점을 최소화하는 길이 또 하나의 관건이다. 말은 말로만 그치는 게 아니라 '말은 바로 행위'(비트겐슈타인)이므로 거짓은 반드시 추방돼야만 한다.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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