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인 공간 '천재의 삼각지'를 아십니까

입력 2005-06-25 11:05:32

대구 경북의 문화인들은 대체로 천재의 삼각지라 불리는 '골든 델타'를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골든 델타'는 대구시 중구 계산동 169번지 현진건 생가터에서 계산성당 옆으로 이어지는 뽕나무 골목, 계산서원을 돌아나와 개울이 흐르던 옛길, 그리고 구 고려예식장 건너편에 있던 남산병원(현재 알리안츠 빌딩 건물 부근) 일대를 일컫는다.

이곳에는 한줄기 빛처럼 영감을 번득이던 문화인들이 넘칠 수 없는 끼와 역량을 발산하기도 했고, 서서 죽더라도 무릎 꿇고 살 수 없다는 민족지도자들의 꿈과 이상이 서리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도 대구에 '황금의 삼각지'가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정신문화를 견인하던 대구지역에는 전란의 와중에 피란온 타지 문화인들도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공초 오상순은 동아쇼핑 옆골목에 살면서 약령서문 건너편에 주점(아세아 오뎅집)을 운영했다. 김팔봉 마해송 최정희 최독견 전숙희 장만영 김이석 양명문 정비석 최태응 박두진 최인욱 김윤성 이상로 유주현 성기원 이덕진 방기환 작곡가 김동진 등은 대구에서 피란살이를 하면서, 동성로 3가 해동라사 옆에 있던 석류나무집이나 향교 건너편의 마양집(속칭 말대가리집), 구 영남일보 건너편 감나무집을 찾아 석양주를 들이키며 전쟁의 아픔과 타향살이의 애달픔을 달랬다.

◇천재의 삼각지대

-뽕나무 골목(계산동 2가 169 현진건 생가터 일대)

동아쇼핑 옆 골목에서 계산성당 주차장으로 이어지는 좁다란 뽕나무 골목은 폴란드의 '황금의 삼각주'(golden delta)로 불리는 비아리스토크에 버금갈 정도로 대구의 정신세계를 이끈 문화인물들이 많이 배출된 '천재의 삼각지대'의 시작점이다.

비아리스토크에서는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 음악가 쇼팽, 쿠오 바디스의 작가 셴켸비치, 에스페란토를 창시한 자멘호프 등이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듯이 대구의 뽕나무 골목에도 '빈처' '운수좋은 날'을 쓴 소설가 현진건의 생가(후에 수동으로 이사)가 있었고, '켄터키 옛집'을 번역 소개한 박태원과 동생 박태준이 작품을 썼다.

아버지가 군수를 지낸 이쾌대와 이여성 형제가 이곳에서 화가, 민속사가로서의 꿈을 각각 키웠고, 뽕나무 골목이 계산성당으로 연결되는 지점에 경제인 서예가 박기돈이 살았다. 바로 곁은 독립운동가이며 화가로 활동했던 이상정 장군의 주택이었다.

-서쪽으로 200m 지역(계산동 2가 84 상화고택 일대)

신성건설이 주상복합(미소지움)을 짓고 있는 전면에는 대구 가두극장 창립멤버인 이원식의 백부인 이호진이 운영하던 영천한의원이 있었다. 목조 반양옥인 영천한의원이 건립되기 전에는 영과회 창립회원인 주정환이 살았다. 영천한의원 옆집에 서예가 서동균의 화실이 있었으며, 담 뒤집(막다른 안창집)에 시인이자 독문학자인 이효상이 살았다. 열혈 민족시인 이상화가 미즈 산부인과 옆 골목길 안집에서 숨졌으며, 상화 고택 옆에는 경향지 '집단' 편집인이자 평론가인 남만희가 살았다.

◇계산성당 아래쪽

계산성당에서 매일신문사로 돌아나오는 곳은 예전에 개울이 흘렀다. 이곳에서 '씨뿌린 사람들'을 간행한 목우 백기만이 과자점을 꾸렸다. 영화감독 김유영은 백기만의 과자점 앞 골목집에서 소설가 최정희와 신혼살림을 차렸다. 김유영이 서울 적십자병원에서 죽자 최정희는 파인 김동환과 연을 맺었다. 피란시절(50~52년) 최정희는 딸(채원)을 데리고 남산동 언덕배기 한병채 집에 세들어 살기도 했다. 이때 혼자 사는 최정희의 집에 크리스마스 이브날, 구상이 마해송을 앞세우고 최인욱과 함께 술병을 옆에 끼고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들이닥쳐 밤을 새우기도 했다.

◇알리안츠생명(구 남산병원) 주변

구 고려예식장 건너편(알리안츠생명 건물 일부와 그 뒤쪽)은 화가 이인성의 장인인 김재명이 경영하던 남산병원 자리였다. 이인성은 처가의 반대를 무릅쓰고 김재명의 딸(김옥숙)과 결혼, 남산병원 3층에 아트리에를 꾸렸다. 남산병원 뒷골목에는 문학평론가이자 카프파의 중심 인물인 이갑기가 살았다. 대구고보 출신으로 '아귀도', '아, 조선' 등의 작품을 남기고 친일행각 끝에 일본에 귀화한 장혁주도 남산동 언덕배기에 살았다. '임자없는 나룻배'를 감독한 영화인 이규환이 장혁주 집에서 네 번째 집에 살았다.

◇덕산파출소 부근

덕산파출소 뒤 출판사 북랜드 인접한 곳에 오래된 나무가 서 있는 한옥이 '근원수필'의 저자이자 탁월한 미술사가인 화가 김용준의 고택이다. 북랜드 뒤편 돌담집이 주덕근의 집이며, 아버지(김덕경)가 장로였던 김문보, 김문집 형제도 이 언저리에서 살았다.

◇제일여중 자라바위 근처

제일여중 담을 따라 십여m 안으로 들어가다 오른편 골목에 음악평론가로 '물새 발자욱'을 지은 윤복진의 집이 있다.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나리오 부문에 황혼이 당선된 작가 박민천도 이 부근에서 살았고, 음악가이자 시사평론가인 박기준도 이곳에 살았다. 화가 박명조의 첫 번째 집은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수도산 자락에 있었다.

◇대구상고 뒷담길

6·25 일기라고 할 수 있는 유고집 '역사 앞에서'를 쓴 역사가, 번역가, 국문학자 김성칠이 이곳에 살았다. 경성제대의 귀재인 김성칠은 용비어천가를 최초로 해석한 '주해 용비어천가'를 지었으며, 한글의 중요성을 강조한 학자로 유명했다. 김성칠의 '조선역사'는 교재로 쓰였으며, '북침은 없다'고 주장하다가 영천에서 빨갱이들에게 피습당해 죽었다. 김성칠의 집에서 가까운 곳에 골목안에 성악가 권태호가 살았다.

◇희도학교 북쪽 수동, 만경관 옆, 기타

만경관 옆에는 대구가 낳은 세계적인 학자 김석형의 생가가 일부 음식점으로 활용되고 있다. 대표적인 명문가 가운데 하나인 김석형의 본가(부친 김의균 대구복심법원 판사) 마당에는 연못까지 만들어졌다. 희도학교 북쪽에는 대구미술사를 창설하고, 이인성의 천재성을 발견하여 아동미술대회에 내보내면서 키운 서동진의 집이 있었고, 향토회 창립 동인인 최화수가 살았다.

최미화 편집위원

사진: 1. 이육사 문학관 2. 오일도 생가 3.조지훈 생가 4.금경연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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