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대 할아버지가 진료실을 찾으셨다. 항상 불안하고, 매일 악몽에 시달린다는 것이다. 새벽에 깨어 베개를 들고 총 쏘는 시늉을 하고, 비행기 소리만 나도 안절부절 못하며 숨는다고 했다. 집안에서 매일 술로 소일하시는 이 할아버지는 한국전쟁 당시 학도병으로 참전한 경험이 있었다. 전쟁이라는 한계 상황이 빚어낸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만성적으로 앓고 있었던 것이다.
영화 '7월 4일생'의 주인공 라니는 미국 독립기념일에 태어난 것마저 자랑스러워하며, 대학 시절 베트남전에 자원 입대한다. 미국 정신에 투철한 쇼비니즘적 선택이었을까. 그러나 조국으로 향했던 신념과 용기는 불구의 몸과 정신적 불안 장애만이 그에게 훈장처럼 남았다.
폭탄이 쏟아지는 베트남 전장에서 라니는 실수로 민간인 가족을 집단 사살한다. 시체더미 속에 숨이 넘어갈 듯 울어대는 아기를 뒤로 한 채, 공포에 질려 도망치던 라니는 설상가상으로 동료를 적으로 오인하여 사살하고 만다. 라니 역시 총상을 입고 하반신 마비가 된다. 비록 불구의 몸이 되었지만, 용감한 참전 용사라는 자부심으로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미국 사회는 반전 여론으로 들끓고, 상이군인은 굴러다니는 베트남을 상기시키는 천덕꾸러기일 뿐이었다. 자기 연민과 상한 자존심이 범벅되어, 고립감은 무엇으로도 희석되지 않았다.
라니는 전쟁의 충격으로 인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는다. 아기의 울음소리가 귓가에 맴돌고, 동료를 사살하던 장면이 반복적으로 떠올라 고통스러웠다. 사회의 냉대와 불안장애를 겪으면서 라니는 절규한다. 음경과 고환을 되찾을 수 있다면 내 가치관을 모두 포기하겠다고.
미국 남북전쟁 당시 군인들이 보인 피로감, 두통, 심계항진 등의 증상을 '솔저스 하트(soldier's heart)' 라고 한 것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첫 유래이다. 그 후 1차 세계 대전 당시의 '쉘 쇼크(shell shock'포탄 작렬에 의한 충격)',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전쟁 신경증', 월남전 참전 용사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등은 같은 정신 질환이다. 그러나 1990년 걸프전 참전 군인의 경우는 신경학적인 증상을 더 많이 호소하여, 이전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와는 따로 분류하여 '걸프전 증후군'이라고 하였다. 미국은 부인하고 있으나 독소나 화학 무기를 사용했다는 증거일까.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는 전쟁뿐만 아니라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대구 지하철 참사 같은 재난이나 강간, 신체적 위협 등 여러 종류의 스트레스에 의해서도 유발될 수 있다. 이 불안 장애의 특징은 겪었던 끔찍한 사건이 반복적으로 재경험되는 것이다. 꿈에 계속 나타나거나, 마치 지금도 그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불안해한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사건과 비슷한 장면만 봐도 불안해하고, 회피하는 것도 중요한 증상이다. 집중 곤란, 흥미 상실, 대인 관계에 무관심하고 예민, 놀람, 수면장애 등을 보인다. 피로, 두통, 근육통 같은 신체증상이나, 기억장애나 공황발작, 지나친 흥분이나 폭발, 충동적 행동을 보이기도 하고, 약물남용과 알코올 남용이 흔히 동반된다.
6월은 호국 보훈의 달이다. '초록의 희망을 이고 숲으로 들어가는(이해인의 '유월의 숲에는')' 아름다운 계절에 병원을 찾은 할아버지의 고통은 더 두드러져 보인다. 충혼탑 참배 등의 의식과 더불어 전쟁 후유증으로 고통 받는 분들에게 치료의 기회가 살갑게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정신과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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