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한자-見金*如石(견금여석)하라

입력 2005-06-06 11:22:37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최영 장군

최영(崔瑩) 장군은 두 차례에 걸친 홍건적의 난을 비롯하여 수많은 전쟁에서 뛰어난 *方策(방책)으로 적을 물리쳤다. 비록 이성계의 위화도 *回軍(회군)으로 큰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지만 용맹하고 청렴한 장군으로 길이 기억되고 있다.

최영의 아버지가 그에게 항상 경계하여 말하기를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고 하였다. 최영은 큰 띠에 그것을 써서 평생 가슴에 새겨 잊지 않았다. 큰 권력을 손에 쥐고 위엄을 안팎으로 떨칠 때에도 털끝만큼이라도 남의 것을 취한 일이 없었다.

당시 벼슬아치들은 서로 초대하여 장기나 바둑으로 날을 보내며 다투어 맛 좋은 음식을 마련하는 등 사치에 빠져 지냈다. 그러나 최영은 손님을 맞이하면 낮이 지나도록 음식을 내오지 않다가 해가 저물어서야 기장과 쌀을 섞어 밥을 짓고 나물을 곁들여 내오니 여러 손님들이 나물밥을 다 먹고 맛이 있다 하면 최영이 웃으면서 "이것 또한 병법(兵法)이지요"라고 하였다.

당시 중국에서 일어난 명나라는 원나라에 대립하면서, 고려에게는 원나라와의 *親交(친교)를 끊고 철령(지금의 강원도 북쪽 함경남도 남단) 이북의 땅을 내놓을 것을 강요했다. 고려는 사신을 보내 본디 고려 땅이라고 주장했으나 명나라는 듣지 않았다. 이에 대해 고려의 실권을 잡고 있던 최영은 북진정책을 펴자고 주장한 반면 이성계와 정몽주는 명나라와 국교를 맺자고 주장하였다. 왕이 요동 정벌을 허락하자 이성계는 작은 나라가 큰 나라에 대적할 수 없음과 여름철 군사동원의 어려움, 그리고 장마철 전염병이 돌 위험 등을 이유로 요동 정벌을 반대했다.

그러나 출동 명령이 떨어져 이성계가 군사를 끌고 압록강에 있는 위화도에 도착했을 때는 장마로 강물이 불어났으며 예상했던 대로 전염병까지 돌았다. 이성계는 회군하겠다고 보고했으나 왕은 공격 명령을 철회하지 않았다. 이에 반기를 든 이성계는 군사를 돌려 오히려 칼날을 왕에게 겨누었다. 이 소식을 듣고 최영은 안주에서 개경으로 돌아와 군사를 이끌고 반란군에 맞섰다. 그러나 정벌에 많은 수의 군사를 동원한 뒤라 남은 군사로 반란군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결국 최영은 명나라에 대한 역적이라는 죄로 고양(高陽 : 경기도 고양시)에 귀양을 갔다가 두 달 뒤에 처형되었다.

자료제공 : 장원교육 한자연구팀

@한자풀이

* 如(여) : 같다

* 方策(모 방, 꾀 책) : 방법과 꾀

* 回軍(돌 회, 군사 군) : 군사를 돌림

* 親交(친할 친, 사귈 교) : 친하게 지내 가까이 사귐

※ 지난 달 16일자 한자 코너 편에서 사육신에 김문기가 아닌 유응부가 포함돼야 한다는 독자의 지적이 있었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에 문의한 결과 1977년 김문기를 병자정난(단종복위 모의사건)의 주모자로 인정했으나 1982년 위원회의를 열어 '김문기 선생을 현창하되, 종래의 사육신 구성(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에 대하여는 변경한 바 없음'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합니다. 장원교육측은 김문기가 들어 있는 현 중등 교과서를 참고했으나 국사편찬위의 1982년 결론을 존중하는 것이 논란의 여지를 줄일 수 있겠다고 밝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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